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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레퀴엠
in 정동극장, 2022.12.03 2시
류정한 맥베스, 안유진 올리비아, 정원조 뱅쿠오, 김도완 맥더프, 박동욱 로스, 이상홍 던컨, 이찬렬 맬컴, 정다예 애너벨, 홍철희 캘런, 김수종 경호원. 류맥베스 자첫. 류배우님 첫 종일반.
연극 무대의 류배우님이라니. 그것도 본인이 직접 선택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라니. 무려 느와르에 레퀴엠이라니.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조금씩 풀리는 사진과 극에 대한 인터뷰 문구 하나하나를 부여잡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기존에 해보지 않았던 인물을 연기하는 류배우님을 18년 지바고 이후 4년 만에 처음 만난다는 점도 마음을 설레게 했다. 대극장 뮤지컬 주연배우로 살던 배우가 중소극장 연극에 도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그 무대의 첫공을 보지 못하게 만든 현업 일정을 원망하며 처음으로 류배우님 종일반에 도전했다. 동일한 극을 같은 날 연달아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는데, 두 번째 관극에서 장면 장면이 보다 명징하게 다가오는 경험이 신선했다. 오래간만에 회전문 도는 기분이 들어서 묘한 즐거움도 더해졌다. 다만 후기를 쓰려니 부담스럽다는 단점이 있네. 자첫 관극 후기는 극에 대한 전반적인 첫 감상을 남겨보고, 자둘 후기에서 류배우님을 포함한 배우들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호불호주의, 스포 있음※
일단 낮공만 관극한 당시의 첫 감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밋밋하고 담백했다. 이런 표현을 류배우님 공연 후기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지루했다. 원작의 텍스트는 성실히 가져왔으나, 고전 특유의 깊이감 있는 통찰력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배경을 "1920년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설정했다면 그에 맞는 각색 또한 존재해야 하는데, 현대어 어미와 시대상을 반영한 의상 외에는 특별한 부분이 없었다. "느와르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분위기 역시 애매했다. 바가 있고 재즈풍의 음악이 흐르며 멋진 코트를 입은 남성들이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는 것이 누아르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면, 장르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하지 않은가.
연극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맥베스를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에 기대한 바가 있다. 중후한 고전의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도 느와르라는 색다른 분위기를 접목시킨 스타일리시한 극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원작을 충실히 담아낸 <리차드3세>의 생생함이나 <오이디푸스>의 강렬함을 갈망했고, 독창적인 각색을 거친 <일리아드>나 <오만과 편견>의 참신함을 고대했다. 아쉽게도 이러한 기대치를 만족시키기엔 애매했다. 지난 4백 년 간 수없이 무대에 올라온 고전을 무난하게 다듬어 온 균형감은 있었으나, 원작이 던지는 화두를 전달하는 무게감은 부재했다. 차라리 고전 특유의 어미를 어느 정도 유지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면, 혹은 1920년대 시대상을 제대로 부각하며 도발적인 각색을 거쳤다면 어땠을까.
극의 제목에 맥베스 "레퀴엠"을 명기한 의도도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이 극의 음악들이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겠는데, 프로그램북을 읽어봐야 할 듯 싶다. 작품에 음악이 많다는 점은 제작발표회 인터뷰를 통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연극이라 명명하기 어색할 정도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넘버들이 처음에는 다소 산만하지 않은가 싶었으나, 맥베스의 착란 증상을 효과적으로 주지 시키는 청각적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어 금세 적응했다. 피아노 한 대만으로 진행하는 음악과 넘버가 중독성 있는 매력이 있어서 귀가 빠르게 익숙해진 것도 있다. 노래가 이렇게 많은데 정작 뮤지컬 배우 두 분은 한 소절도 부르지 않는다는 아이러니가 아쉬우면서도 흥미로웠다.
수직의 길쭉한 구조물을 겹겹이 두고 장면을 구성하는 무대 연출이 작품의 뚜렷한 개성이다. 무대 양쪽 옆의 조명을 통해 마주선 배우들이 서로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도록 한 조명 연출이 인물들의 감정을 보다 극적으로 드러낸다. 수직의 구조물 역시 조명과 어우러지며 다양한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연출한다.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내려앉는 음영이나 감옥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등이 효과적으로 장면을 구성했다. 구조물을 막처럼 활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는 무대 앞쪽과 테이블 등의 소품을 정리하는 무대 안쪽을 구분하면서도, 막 바깥쪽의 배우들을 빤히 응시하는 막 안쪽의 배우들을 사이사이로 드러냄으로써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각을 매끄럽게 전이한다.
"여자가 낳은 남자는 맥베스를 죽일 수 없다."
결말만큼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영화 <무간도3>를 연상시키는 각색. 원작에서는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온 맥더프가 맥베스를 죽인다. 하지만 이 극에서 맥더프의 이런 설정은 없다. 대신 맥더프는 자신의 육신을 죽여달라는 맥베스의 간청에 그를 죽여주지 않는 형벌을 내린다. 잠들지 못하는 저주에 사로잡힌 맥베스가 제 머리에 총을 겨눈다. 탕. 하지만 쓰러지는 건 제가 아니다. 예언 속의 남자는 맥더프를 위시한 타인뿐만이 아니었기에. 맥베스 본인 또한 스스로를 죽이지 못한다. 결코 용서받지 못한 채, 영겁의 시간 동안 악몽에서 깨어날 수 없는 자. 제 손으로 잠을 죽여버린 자, 맥베스.
자둘 하자마자 화해를 했기 때문인지, 자첫 직후의 날카롭던 불호가 꽤나 마모됐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못 만든 극은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기대치가 워낙 드높았던 지라 쓴소리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류배우님의 도전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으며 12월 한 달 동안 온 마음으로 응원할 예정이다. 매일 원캐로 공연하면서 한층 깊고 단단해질 류정한 맥베스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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