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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in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2019.02.22 8시





황정민 오이디푸스, 배해선 이오카스테, 박은석 코러스 장, 남명렬 코린토스 사자, 최수형 크레온, 정은혜 테레시아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늘 묻는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이미 정해진 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조차 신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고단한 삶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간의 대답은 각기 다를지언정 본질은 늘 같다. 설령 숨을 쉴 수조차 없이 괴로울지라도 운명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고. 주어진 인생을 직접 살아내며 기어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는 확고한 의지가 있노라고. 운명은 그저 놓여진 길일 뿐, 그 위를 직접 걸으며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고.



이 극은 수없이 다뤄진 고전을 정석적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냈다. 긴장감 있는 연출과 담백하고 깔끔한 구성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도 극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공간감과 입체감이 돋보이는 영상과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선, 적절한 소품 및 구조물의 사용이 물 흐르듯 유려했다. 음산함이 가득한 숲 속, 모래바람이 치는 사막 같은 길, 높은 천장의 웅장하고 울림이 큰 궁전 등 다양한 장소를 표현하기 위하여 깊은 무대를 영리하게 활용하며 정돈된 장면 전환을 연출했다. 적재적소의 음악과 효과음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의 깊고 풍성한 음색의 목소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쌓는 반복적인 대사들이 마치 웅장한 화음처럼 공간을 채웠다. 까마귀 소리나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내는 소리, 곡소리 등이 비장함을 부각시켰고, 이는 중심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나치게 구어체적인 어미에 대한 비판을 미리 접하고 갔는데, 약간 의아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는 독특한 대사들을 연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배우들 덕분이었는데, 일관성 있는 표현력 덕분에 오히려 캐릭터성이 확고해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주변 인물들의 문어체가 내뿜는 강한 위압감과, 번뇌하고 고민하고 무너지는 오이디푸스의 구어체가 지닌 위태로움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연출 상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극적인 신탁이 선언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쩌렁쩌렁한 문어체로 선언하는 와중에 예기치 못하게 툭툭 튀어나오는 구어체는, 고전이 던지는 묵중한 질문이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는 듯 관객을 끌어들이는 환기의 역할을 했다.



※스포있음※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최초의 저주"



테베의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 전왕의 죽음을 파헤치는 오이디푸스는 이끌리듯 한 걸음씩 진실로 다가간다. 부디 더이상 알려 들지 말라고 간절히 만류하던 예언가 테레시아스와 왕비 이오카스테처럼, 온전한 진실을 가진 양치기 역시 무섭고 무거운 진실을 깊은 곳에 묻고 함구하려 한다. 그에게 말하지 않으면 죽음 뿐이라 절박하게 고함치던 오이디푸스는, 휘두르던 지팡이를 툭 떨구고 무릎을 꿇은 채 짓눌린 신음처럼 진심을 토해낸다. 그저 알고 싶다고, 내가 누구인지 그 진실을 알고 싶은 거라고. 인간적인 연민으로 그를 살렸던 양치기는, 지독히 인간적인 동정심으로 인해 결국 입을 열고야 만다. 끔찍한 신탁의 저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던 가련한 인간에게 내려지는 선고. 이미 예언은 이루어졌도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은 절규하듯 묻는다. 왜 나를 살렸는가. 인간은 답한다. 불쌍해서, 버려져 울고 있는 아이가 그저 불쌍해서 그랬노라고. 인간이기에 행한 선의를 저주할 수 없는 인간은 허공을 향해, 인간이 아닌 것을 향해, 신을 향해, 물음을 토해낸다. 저 산은 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는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는, 존재의 본질까지 부정하는 끝모를 나락. 저주에서 도망쳤지만 실은 진짜 저주를 향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행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을 하나씩 읊으며 제 가슴을 네 번 내리친다. 예언대로. 자기자신을 향해 더럽다 외치며 양손을 번갈아가며 발작하듯 몸을 털어내지만,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과 떨쳐낼 수 없는 끔찍한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기에, 인간은 스스로를 끔찍해한다.



"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직접 내린 저주를 기억한다. 테레시아스가 예언한 모든 것을 기억한다. 왕비의 브로치로 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는 처남이자 삼촌인 크레온에게 청한다. 모두가 바라보는 곳에서 자신을 내쫓아 달라고. 운명의 결과물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자신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쏟아낸 저주를 오롯이 마주하겠노라 스스로 선택한다. 비록 새하얀 옷을 입고 한없이 작게 몸을 웅크린 비참한 모습이지만, 자유의지로 제 인생을 결정한 오이디푸스의 본질은 숭고하다. 비틀대며 걷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지팡이를 건네주는 코린토스 사자의 손길에, 오이디푸스는 울컥 울음을 토한다. 그리고 미소를 띄운다. 이것이었노라고. 이것이 나를 살린 인간의 선의였노라고. 도움을 마다한 채 제 운명을 온전히 품고 홀로 걸음을 내딛는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사람들. 무대 아래로 천천히 내려와 위태롭지만 올곧게 걷는 그를 숨죽이며 바라보는, 관객들. 운명에 저항하다 운명에 굴복당했지만 끝내 운명을 끌어안는, 인간.





관극을 하며 개인적으로 해석해본 인물이 있다. 코린토스 사자. 진실에 근접했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의심하는 오이디푸스의 앞에 나타나서, 그가 주어진 길을 걷도록 유도한다. 인생은 마치 화살처럼 하나의 방향성만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기라도 하듯,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건 활시위를 가볍게 튕긴다. 코린토스 왕은 핏줄이 섞인 아비가 아니라고. 그대가 굳게 믿어온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었노라고. 오이디푸스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한 선의였지만, 깃털처럼 가볍게 내뱉은 그 사실은 파국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시발점이 된다. 불려온 양치기가 끝까지 묻어야만 했던 진실을 끈질기게 캐묻는 행동 역시, 오이디푸스가 사실을 믿도록 돕기 위한 선의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늘 선한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오이디푸스는 그 선의 때문에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로 도망쳤다 믿었으나, 실은 거대하고 절대적인 힘에 이끌려 되돌아와 마주하게 된 운명을. 그래서 코린토스 사자는, 선의를 가진 인간인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의도를 품고 운명을 끌어내는 신의 사자이기도 했다.



연극은 어렵다.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성찰과 사유를 강권한다. 그래서 흥미롭다. 뮤덕의 정체성을 굳건히 고수했던 수 년의 덕질이 무색하게도, 마침내 연뮤덕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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