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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레퀴엠
in 정동극장, 2022.12.03 6시
류정한 맥베스, 안유진 올리비아, 정원조 뱅쿠오, 김도완 맥더프, 박동욱 로스, 이상홍 던컨, 이찬렬 맬컴, 정다예 애너벨, 홍철희 캘런, 김수종 경호원. 류맥베스 자둘. 류배우님 첫 종일반.
자첫 관극이 다소 아쉬웠기에 종일반 밤공 자둘이 현명할 선택일까 걱정하며 객석에 앉았다. 하지만 쓸데없는 염려 따위 말라는 듯 낮공보다 더 좋아진 무대 위의 류배우님 덕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첫공주부터 노선이 달라지다뇨. 회전문을 돌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치던 지난날의 류배우님 필모들이 아련히 떠올라 행복했다. 낮공은 세 번째 공연임에도 약간 긴장한 티가 났는데, 밤공은 몸과 마음을 다 풀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무대를 휘어잡았다. 이래서 언제나 믿고 봅니다, 제가.
오랫동안 대극장 뮤지컬 무대에 서며 특유의 자극적이고 맛깔난 MSG에 특화된 배우였던 만큼,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톤 정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티가 많이 났다. 다만 낮공에서는 7년반 동안 만나온 류배우님의 전작들이 자주 연상되었는데, 밤공에서는 긴장을 덜어낸 대사톤 덕분에 그 기시감이 많이 사라졌다. 류배우님의 목소리와 발성은 고풍스러운 어휘가 찰떡같이 어울리기에 이 극의 현대적인 어미가 아쉽지만, 직설적인 현대어를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연기하는 음성도 매력적이었다. "나다운 게 뭔데!" 라는 유치한 대사마저도 어색하지 않게 소화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대사가 마음에 든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스포있음※
낮공의 류맥베스는 날카로운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고, 밤공의 그는 뭉근하게 집요하고 예민했다. 대관식 파티 장면에서 올리비아에게 건배사를 강요하는 부분과 마지막 장면에서 로스에게 성문을 왜 닫지 않았느냐 꾸짖는 부분의 대사톤이 완연히 달랐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대사와 결말의 질감까지 달라졌다. 낮공은 절망이 짙었다면 밤공은 체념에 가까웠다. 밤공의 노선이 이 극의 맥락과 더 매끄럽게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낮공보다 밤공이 훨씬 좋았다.
낮공보다 밤공에서 좋았던 점 하나를 꼽으라면 올리비아의 죽음을 마주한 장면. 뱅쿠오가 선물한 목걸이가 목을 조른다며 목 졸린 소리를 내던 올리비아처럼, 지독한 절망에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제 목을 부여잡고 꺽꺽 대던 맥베스. 언어로 조합되지 않는 억눌린 신음 소리에 점차 날이 서다가 끝내 귀에 익은 멜로디로 이어지며 날카롭게 공간을 가른다. 노래하지 않는 맥베스가 가장 깊은 나락에서 토해내는 비명 같은 허밍이라니. 이 장면에서야 비로소 "레퀴엠"의 의미를 이해했다.
안유진 배우를 무척 오랜만에 만났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여러 차례 감탄했다. 우유부단한 맥베스를 독려하고 인도하는 냉정함, 맥베스 대신 칼을 두고 돌아왔을 때 피 묻은 손을 덜덜 떠는 혼란과 두려움, 대관식에서 맥베스의 변화를 민감하게 인지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우아하게 외양을 포장하는 의연함, 자식 같이 사랑한 뱅쿠오의 아들마저 죽이려 한 맥베스를 향한 경악, 던컨 왕을 죽이기 전의 맥베스처럼 보이되 잡히지 않는 칼을 응시하는 차분한 독백, 헛소리를 쏟아내며 파멸로 치닫는 생생한 광기, 제 아이를 발견하고 다정하게 안아 든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 등장하는 장면마다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명확히 보여주는 올리비아의 연기에 흠잡을 곳이 하나 없었다.
정원조 배우는 여러 연극에서 자주 만났기에 익숙했다. 단정한 톤과 연기로 그려낸 든든한 친구였으나, 맥베스의 착란과 광기로 얼룩진 환각 속 희번뜩한 눈동자의 영혼으로 재등장하는 대비감이 좋았다. 뱅쿠오보다 훨씬 많은 분량의 맥더프 역을 맡은 김도완 배우는 처음 만났는데, 정석적인 연극배우 느낌을 물씬 풍기며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줬다. 가족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동생 로스 역의 박동욱 배우 또한 색깔 있는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톤으로 안정감을 줬다. 홍철희 배우와 김수종 배우도 강렬한 표정과 눈빛으로 깔끔하게 여러 역할을 다했다.
던컨 왕 역의 이상홍 배우도 개성이 강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왕 역할에서는 다소 튀지 않나 싶었으나, 죽음 이후에 마녀 역할을 할 때의 대사톤이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하며 앞쪽은 노래로 뒤쪽은 대사처럼 선고하는 목소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맬컴 왕자 역의 이찬렬 배우의 연기가 묘하게 곽동연 배우 느낌이 나서 신기했다. 맥더프에게 반항하는 장면에서 "권력이란 게!!!" 하고 버럭 화를 내고 "그렇잖아요," 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연기톤을 잘 소화해서 좋더라. 이 장면에서 연기 변주 넣으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정다예 배우님 음색 너무 좋다! 대극장 뮤지컬 앙상블 많이 하신 배우라서 얼굴과 이름이 익었는데, 재즈 풍의 넘버를 소화하는 목소리가 몹시 매력적이어서 귀가 즐거웠다. 묵직하게 내는 마녀 역의 대사톤도 좋았다. 배우들이 다 같이 부르는 부분이나 돌림노래처럼 부르는 부분에서 각각의 독특한 음색이 잘 어우러져서 신기했다. 이쯤 되면 연극보다는 음악극이라는 장르가 더 잘 어울리는 극이 아니었나 싶네.
문득 레베카가 떠오르고, 이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이 겹쳐 보이며, 저 대사는 잭더리퍼와 몬테크리스토와 지킬앤하이드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이런 행동은 라만차와 시라노가 연상되는 경험이라니. 배우님을 오래 보긴 했다 싶으면서도, 익숙한 모습과 더불어 새로운 연기를 볼 수 있음에 즐거웠다. 95분이라는 길지 않은 극임에도 불구하고 하고픈 말이 꽤나 많은데, 이는 다음 관극 후기로 미뤄보려 한다. 자셋 전에 원작 재독과 프로그램북 정독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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