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22.01.30 7시
류정한 지킬/하이드, 선민 루시, 조정은 엠마. 류지킬/류하이드 자열일곱. 류선조 자셋.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공연이었다. 17번의 관극 중 손에 꼽히게 좋은 날들이 있었지만, 그중 단 한 회차만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날을 고르겠다. 류지킬의 미모, 풍성한 음색과 변주, 귀족미 풍기는 노선과 결말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이 극을 보며 지킬의 상황과 감정에 몰입하고 그 여운에 젖어서 커튼콜은 물론 귀갓길 내내 눈물을 뚝뚝 흘린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껏 기다려온 지킬은 바로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날의 류지킬은 연구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반듯하고 단정한 상류층 지식인으로, 모든 행동에 예의와 기품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하이드의 탄생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몸에 밴 고아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류지킬이어서, 존재만으로 위압적이고 포악하며 잔혹한 류하이드와의 대비가 한층 극명했다. 원써폰에서 엠마의 손을 떼어내는 류지킬의 손길은 다정하게 우아했고, 댄져에서 루시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몸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류하이드의 행동은 거리낌 없이 폭력적이었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이 분리되는 대신 구분된 악이 극단적인 형태의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날이었고, 그리하여 번뇌하는 인간 류지킬과 절대적인 악 류하이드는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컨프롱에서 지킬이 말하는 도중에 하이드가 튀어나와 왼손이 오른 손목을 붙잡는 등의 디테일이 유지되며 서슬 퍼렇게 압도적인 류하이드가 가시적으로 드러났지만, 힘에 밀려 오른팔을 파들파들 떨면서도 끝까지 올곧게 맞서는 류지킬의 단단함이 굳건했다. 이토록 단정하고 처절한 컨프롱이었기에, 지옥 그 너머의 것을 보고 끝내 돌아온 류지킬이 행복이라는 희망을 엿본 순간 절망을 마주하게 된 낙폭이 한층 극적이었다. "하필 지금 하필 이때" 라고 부르짖는 류지킬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지 명확하게 와닿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내던지는 결말이 고결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날의 류지킬은 루시에게 성애적인 끌림이 아니라 인간적인 호감과 호기심을 느꼈다. 브링힘 내내 불편한 기색이다가 넘버 중반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루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미소 짓는 대신 날카롭기까지 한 눈빛으로 관찰하듯 그를 응시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이 당신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며 반짝이는 눈빛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뒤늦게 루시가 만진 왼쪽 손등을 감싸며 짓는 표정도, 유혹에 흔들린다기보다는 새로운 감정에 멈칫대는 인상이었다. 썸원 직전 휩쓸리듯 루시와 입을 맞춘 뒤에도 예기치 못한 제 행동에 당혹과 약간의 죄책감이 스쳤다. 퇴장 직전 두 번째로 입술을 만지작거릴 때, 이전에는 무의식적으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황급히 숨겼는데 이날은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다가 떨쳐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류지킬은 진심으로 "그냥 친구로"서 루시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선의와 친절을 생전 처음 받아본 애기루시는 당연히 류지킬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명함이란 걸 생전 처음 보는 듯 앞뒤좌우로 명함을 뒤집어 구경하던 애기루시는 다시 지킬의 명함을 빤히 보며 "친구.." 하고 중얼거린다. 친구라는 호명조차 처음 입에 올려보는 듯한 생경한 표정이, 썸원을 거치며 자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과 용기로 일렁이기에 이른다.
"그래요. 나도 그분의 친구예요."
자신의 그의 친구이기 때문에 대신 왔다는 어터슨의 말을 듣고 "친구.." 하고 중얼거리는 루시의 얼굴에서 실망보다 깨달음이 앞서는 느낌은 이날 관극이 처음이라 신선했다. 마음을 솔직히 전하기도 전에 당한 실연에 슬퍼하기보단, 사랑하는 그에게 자신이 잠시나마 빛이 되어준 친구였음을 깨달은 애기루시의 표정이 일견 기뻐보이기까지 했다. 서로에게 힘이 될 친구였던 건강한 관계의 지킬과 루시는 처음 봤고, 이 지점이 지독히도 취향이어서 지킬의 감정에 제대로 몰입할 수 있었다. 근간이 곧고 바른 지킬의 본성이 곡해되지 않고 그를 통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루시의 주체성이 부각되는 이 긍정적인 관계가 이날의 류지킬과 애기루시의 노선과 딱 맞아떨어졌다.
류지킬이 루시에게 친구라는 자리를 내어준 이유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제 감정 때문에 선을 긋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의지할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선의였다. 이날의 류지킬이 생각하는 친구는 그런 존재였다. 힘겨운 길을 걷는 이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이날 류지킬은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죠?" 하고선 평소처럼 존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악마가 스트레스를 받았대도 그런 표정은 못 지었을 거라는 어터슨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끊듯이 그를 향해 오른손을 뻗으며 바로 제 할 말을 시작했다. 그렇게 벽을 두긴 했지만, "평생 자네를 믿어왔네. 그리고 지금도." 하며 힘겹게 싸우는 자신을 떠나지 않는 어터슨이기에, 류지킬은 그를 믿고 자신의 최후를 내던진 뒤 고맙다고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정석적이고 담백하면서도 여운이 짙은 공연이어서 행복했다. 이사회에서 이전보다 어리고 불안정한 류지킬이었는데, 생각보다 거센 반대에 부딪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에 순간 울컥했다. 그럼에도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설득하려 드는 그의 절실함이 위태로워 보였다. 선녀엠마의 믿음 앞에서 비로소 안정을 찾는 유약함이 인간적이었고, 불안함을 잠재우며 세상으로 부딪혀나가는 사골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류선녀와 윤어터슨, 봉환댄버스의 히즈웍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데, 이날 선녀엠마 음색이 유난히도 아름다워서 귀가 황홀했다.
"이미 다 말했어요! 내가 아는 모든 걸!"
하이드가 대체 누구냐며 모든 걸 말해달라는 어터슨의 집요한 압박에, 이미 모든 걸 말했노라고 비명처럼 외친 류지킬이 그를 등지고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 뒤 허리를 접으며 "아아악!" 하고 소리 지르는 디테일이 새로 생겼더라.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괴로움과 울분을 참지 못해 고통스럽게 토해내는 이 디테일이 류지킬과 너무 잘 어울려서 좋았다. 나니까 넘버에서 음색이 유난히 풍성하고 묵직해서 행복했고, 웨이백 넘버 도입에서 "다시는!" 하며 높은음으로 외치듯이 부른 것이나, 대사처럼 "이 목숨 끊어질!" 하고 변주한 부분도 극적이고 짜릿했다.
"미친놈" 하고 낮게 조롱한 류하이드가 "기대 이상의 발전!" 이라 외친 뒤 그르렁 거리며 길게 내뱉는 숨소리가 날 선 짐승의 포효 같아서 오싹했다. 특별한 디테일이 추가되지 않았는데도, 이날의 얼랍1은 류하이드의 음성과 존재감만으로 압도적이고 짜릿했다. 얼랍2에서 성호를 그을 때 이마를 찍고 아래로 내려가서는 다시 어깨로 올라오지 않고 그대로 고관절 즈음에서 대충 손목을 까닥거린 다음 술병을 중심부에 두고 털어대는 신성모독 또한 류하이드의 패악과 잘 어울렸다. 댄져를 끝내고 루시가 제 손길을 거부하자 숨을 크게 들이쉬고선 "퉤," 하고 침을 뱉으며 불쾌한 티를 가감 없이 드러낸 류하이드는, 끝까지 루시에게 자비가 없었다.
엔딩에서 죽어가는 연기를 하는 류배우님을 보면 매번 지나간 극들이 스쳐 지나간다. 엠마의 얼굴을 향해 왼손을 뻗기 직전 피를 울컥 토하듯 몸통을 크게 들썩이는 디테일이 특히 현실감 있어서 매번 철렁한다. 류선녀 회차일 때 엠마에게 키스하기 위해 힘겹게 얼굴을 들어 올리는 류지킬의 동작이 유난히 크고 명확한 것도 좋아한다. 그 힘겹고 절실한 몸짓과 그런 그에게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선녀엠마의 얼굴이 지독히 애틋했는데, 이날 선녀엠마가 손을 툭 떨어뜨린 류지킬의 이마에 키스를 해줬다. 약혼식에서 텍미를 부른 류지킬이 선녀엠마의 이마에 키스해줬던 것처럼 말이다. 정말이지 이 페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1막 첫 장면부터 유난히도 예쁜 류배우님의 미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공연까지 완벽하여 어찌나 마음이 충만한지 모른다. 처음으로 웨딩 장면에서 엉엉 울다가 커튼콜에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류배우님이 오케를 향해 몸을 숙이며 "브라보, 브라보!" 하고 외치는 그 육성이 너무 따뜻해서, 선녀엠마와 애기루시를 각각 바라보며 "브라보," 하고 웃으며 말해주는 미소가 너무 다정해서, 또 눈물을 펑펑 쏟았다.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넣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서는 배우님이 고맙고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행복하여 자꾸 눈물이 났다. 좋은 공연이 주는 충만한 여운이 선사하는 벅찬 전율 때문에, 이 순간의 예술을 만나러 계속해서 공연장을 찾게 된다.
부디 모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막공까지 도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막공주에 만나요 배우님!
'공연예술 > Ryu Jung 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 맥베스 레퀴엠 (2022.12.03 6시) (0) | 2022.12.05 |
---|---|
연극 맥베스 레퀴엠 (2022.12.03 2시) (0) | 2022.12.04 |
지킬앤하이드 (2022.01.15 7시) (0) | 2022.01.16 |
지킬앤하이드 (2021.12.26 7시) (0) | 2021.12.27 |
지킬앤하이드 (2021.12.25 2시) (0) | 202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