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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3세
in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22.01.22 6시반
황정민 리차드 3세, 장영남 엘리자베스 왕비, 정은혜 마가렛 왕비, 임강희 앤, 윤서현 에드워드 4세, 박인배 버킹엄 공작 등 전배우 원캐.
황정민 배우의 오이디푸스 연극을 무척 짜릿하게 관극 했던 기억이 생생하여, 다시 돌아온 리차드 3세라는 고전 또한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 후기) 셰익스피어의 작품다운 우아하지만 날카롭고 현학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대사들이 적당한 번역과 각색을 거치며 독특한 매력을 뽐냈다. 그 대사를 맛깔나게 살리는 배우들의 톤이 이야기를 한층 쫀쫀하게 만들었다. 특히 객석을 향해 수차례 독백을 하는 황정민 리차드의 대사톤이 어찌나 몰입을 끌어올리는지, 그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관객들은 그저 휘어잡힐 수밖에 없었다. 고풍스러운 어투를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과장하는 일부 조연들의 대사는 개인적으로 불호였지만 객석 반응은 쉽게 잘 이끌어내는 확실한 효과를 보였다.
15세기말 영국에서 벌어진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장미전쟁을 다루기 때문인지, 리차드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피투성이 시체를 장미 덩굴이 뒤덮는 영상을 매번 띄우는 연출이 있었다. 사진의 생동감도 유화의 질감도 아닌, 미묘하게 불쾌한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그 영상들이 다소 그로테스크 하여 기괴함마저 자아냈다. 고전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리차드 3세의 비틀린 욕망과 뒤틀린 관점을 은유하기에는 다소 적합하여, 그 불쾌함이 극의 마지막 즈음에는 익숙해졌다. 클라이막스의 천과 결말의 바닥 연출은 확실한 시각적인 자극을 남긴다. 다만 1열에서는 바닥 연출이 전혀 안보여서 아쉬웠다. 이 부분을 제대로 보려면 3-4열 정도 뒤로 가야할 것 같다.
"악을 택하고 선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다"
기꺼이 악인의 길을 택한 리차드는 악행을 이어나가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슬픔과 걱정을 가장하며 연기를 하지만, 그 모든 말과 행동은 치밀한 계획을 근간으로 하기에 한층 교활하고 섬뜩하다.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위선자들을 조롱하면서도 제 위선은 돌아보지 않고, 퇴로를 다 막아버린 뒤 친절을 가장한 채 앤에게 손을 내미는 제 잔인함을 즐긴다. 마가렛의 저주를 귀찮은 날벌레쯤으로 여기며 무시한 채, 절대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잔혹한 행동을 지속한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지닌 그 알량한 양심 때문에 끝내 그 역시 파멸하고야 만다. 악행으로 쌓아올린 업보에 발목을 붙잡히고 제 선택들로 축적해온 저주에 온몸을 부딪히며, 유약한 인간은 마땅한 운명을 맞이하고야 만다.
실제 리차드 3세는 옷을 입으면 크게 티가 나지 않는 약간의 척추측만증이었다고 하지만, 수백년 간의 문학작품을 통해 고착화 된 그의 이미지에 걸맞게 황정민 리차드 또한 왼쪽 어깨 위에 큰 혹을 달고서 극 내내 비뚤어진 자세로 존재한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며 전투에 능한 캐릭터를 잘 살렸고, 두 손가락만 길게 뻗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일그러진듯 뒤틀려 굽은 왼손의 모양을 100분 동안 유지하는 모습에는 감탄이 나왔다. 커튼콜 등장까지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인사하기 직전 허리와 어깨를 반듯이 펼치며 부드럽게 인사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무대에 홀로 서서 특별한 조명이나 무대 장치, 소품 하나 없이 오로지 자신의 대사만으로 관객의 집중도를 끌어올리고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들 수 있는 배우는 그리 많지 않다. 연기차력쇼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무대를 제대로 휘어잡는 황정민 배우의 공연을, 좋아한다. 유명한 영화배우라서가 아니라, 무대예술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 매력을 극대화하며 공연의 가치를 높여주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보호막 없이 자기자신을 오롯이 노출하고 홀로 압박을 견뎌야만 하는 무대가 항상 쉽지 않을 것이고 때로는 분명 공포스러울 텐데도, 이렇게 꾸준히 연극을 해줘서 무척 고맙다. 좋은 배우들 덕분에 좋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음에 관객으로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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