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일리아드 (2021.08.07 7시)

일리아드

in 예스24스테이지 2관, 2021.08.07 7시

 

 

 

 

최재웅 나레이터, 장재효 퍼커션 뮤즈. 일리아드 자첫.

 

 

개막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무척 궁금했던 이 극을 드디어 만나고 왔다. 일리아드라니, 1인극이라니, 나레이터마다 뮤즈의 악기가 다르다니, 각각의 나레이터가 풀어내는 텍스트 일부와 런닝타임의 차이가 있다니! 고전을 다룬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확고한 주제를 가지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각 배우에게 어울리는 이미지를 더해 목적적합하게 풀어내는 완성도 높은 작품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이야기를 모르는 청자에게는 친절하고 이야기를 아는 청자에게는 섬세하고 자세한 연출 덕분에 곱씹을수록 맛있다.

 

 

특별한 소품 없는 흙바닥 위를 뛰어다니며 객석과 눈을 맞추고 수없이 반복한 이야기를 또다시 노래하는 나레이터의 문장들이, 그리스의 수많은 함선과 해안에서 6km 떨어진 트로이의 성벽과 참혹하게 쌓인 전쟁의 참상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그려냈다. 판소리의 고수처럼 적절한 순간에 추임새 같은 효과음을 더해 생동감을 끌어올리는 퍼커션 또한 극의 매력을 더한다. 뮤즈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아킬레스의 무구 묘사 장면은 소리만으로 공간을 휘어잡는 거칠고 뜨거운 경험을 가능케 한다. 적재적소의 과하지 않은 조명이 무대의 연출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나레이터가 이야기 속 다양한 인물을 묘사하고 연기하고 표현할 때, 뮤즈는 경청하고 보조하며 함께 호흡한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영웅이, 때로는 사랑과 걱정으로 가득한 가족이, 때로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인 올림포스의 신이, 때로는 지치고 괴로운 나레이터 자신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매번 부를 때마다 마지막이길 바라는 노래를.

 

 

 

 

연극 일리아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에 대해 성토한다. 잔혹하고 이기적인 왕 아가멤논의 오만한 권력을, 광기에 휩싸여 내달리는 파트로클로스의 통제불가능한 비이성을, 두려움에 휩싸여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나 돌았으나 끝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굳건히 마주하는 헥토르의 용기를, 아들의 시체를 돌려받고자 하는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간절함을, 그로 인해 결코 사그라들 것 같지 않던 분노를 탁 놓아버린 아킬레스의 무상을, 이름조차 남지 못한 수없이 많은 어린 소년들의 절망을 노래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시대의 영웅들로 가득하지만, 알고보면 그들의 운명은 신들이 의도한 놀음일 뿐이고 그들이 서있는 자리는 이름 없는 병사들의 시체더미다. 전쟁은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시작되어 거대한 핏빛 웅덩이만 남긴 채 파국까지 치닫는다.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태초의 목적조차 잊은 채 끝없이 되풀이되는 처참한 파멸.

 

 

트로이 전쟁부터 미얀마까지, 나레이터는 삼천년이 넘는 인간의 역사 동안 끝을 모르고 지속된 거대한 전쟁들의 수많은 이름을 하나씩 나열한다. 피를 토하듯 고통스럽게, 내장이 끊어질 듯 처절하게, 세상이 무너질 듯 절망스럽게. 이미 무대 위에서 전쟁의 허망함과 광기를 목도했기에, 나레이터가 내뱉는 날카로운 음절 하나하나는 청자의 심장에 상흔을 새긴다. 반성을 모르고 되풀이 되는 어리석은 욕심은 끝없이 이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극의 제목은 트로이 전쟁만을 특정하는 "그" 일리아드(THE ILIAD)가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전쟁들 중 하나일 뿐인 "하나의" 일리아드(AN ILIAD)다.

 

 

 

 

아들을 죽인 원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독히 증오하는 상대의 아버지를 연민하여 처음으로 인간적인 이해가 맞닿은 유일했던 밤, 평안한 잠에 둘러싸인 고요가 내려앉는다. 위태롭기에 눈물 나게 따뜻한 평화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나레이터는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침묵이 가득한 공기를 건넌다. 그는 헥토르의 장례 그 이후를 노래하지 않는다. 이 참혹한 전쟁은 그저 참담함을 남겼을 뿐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니기에. 그리하여 끝없이 반복되는 역사를, 그 처참한 결과물들을 입에 올린다. 부서지고 불타 사라져버린 문명의 유적지들을 상상해보라고. 마치, 마치,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