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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헬멧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2.06.15 9시15분

 

 

 

 

룸서울 스몰룸. 정원조, 정인지, 김지민, 이정수, 김도빈.

 

 

지난 시즌에 자첫을 했을 때부터,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부모님께 이 극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어졌다. 사람을 패고 고문하는 백골단을 보는 것이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너무 생생하게 트라우마를 자극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렇게 지난 시즌을 보냈으나 3년 만에 돌아온 이 극을 다시 또 보내기는 아쉬웠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드린 뒤, 괜찮을 것 같다고 하신 엄마와 함께 객석에 앉았다. 

 

 

알고 보는데도 여전히 쉽지 않은 극이었고, 특히 헬멧B의 서사에 몰입하며 내내 오열했다. 배우 자첫이었는데, 인지시고니 연기가 말도 안 되게 좋아서 몰입력이 어마어마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해줬다며 다들 생각이 같구나 해서 용기가 났다고 뿌듯해하던 87년의 파릇하고 어린 '아'가, 아무리 미워도 미워하지 않기 위해 미치도록 노력하며 차분하고 서늘하게 상대를 압도하는 91년의 '미친개'가 되기까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코앞에 들이닥친 공포에 덜덜 떨면서도 선배를 혼자 보낼 수는 없다며 문을 막아서던 87년의 일렁이던 눈동자와, 떠난 적이 없었던 이 작은 방으로 돌아와 기억을 곱씹고 분노를 숨기며 시시각각 온 감정을 담아내던 눈빛은, 한 사람이 얼마나 변화했는가를 여실히 담아냈다. 

 

 

"근데 미워하면 저항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생각해. 이 펜 보면서.

나는, 절대, 내 미움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전체적인 감상은 3년 전 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이날 유독 마음을 후벼 판 시고니의 대사가 있었다. 너무 미운데, 나도 인간인지라 내가 맞고 내 옆의 친구가 맞고 맞다가 자꾸 죽으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미워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미워하면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분노에 사로잡히면 저항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왜 이 투쟁을 시작했는지 잊고 마니까. 치미는 분노를 짓이기고 찢기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도,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미움과 맞서 싸우는 시고니의 표정이 지독히 괴롭고 또 외로워 보였다. 누군가의 희생 덕에 포대자루를 덮어쓴 채 홀로 남겨졌던 아이가 복수와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몸과 마음을 내던지다 비로소 그 방을 나가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자꾸 곱씹게 됐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참 쉬운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우리는, 미움과 혐오에 쉽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환경과 구조에 갇혀 있다. 미워하기는 쉽지만 그 미운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원인인 사회구조까지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분노는 절대 혐오를 근간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데도, 마음과 감정이라는 게 이성을 온전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기에 힘겹다. 하지만 시야를 좁게 하고 다른 의견에 귀를 막는 혐오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꿀 수 없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이 늘 그러했듯, 머리는 차갑게 가라앉히고 가슴은 뜨겁게 불사르며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만 하리라.

 

 

 

 

"헬멧 벗을 기회 있었어.

근데 니가 모른 척 했을 뿐이야."

 

 

공연 시작 직전까지 걱정했던 옆자리의 창조주는 완전히 멀끔한 얼굴로 저벅저벅 객석을 나섰다. 도리어 뭘 그렇게 우냐며 나를 어이 없어 하시기까지 했다. 당신이 겪어냈던 길지는 않았던 경험에서 이 이야기는 조족지혈일 뿐이라며 쓰게 웃으시는 얼굴에 도리어 눈물이 더 났다. 여느 대학 앞에나 있던 서점들이고, 여느 운동권 학생이라면 흔히 겪고 접한 일상적인 투쟁이었다는 말씀이, 최루탄과 사과탄을 맞아 눈물콧물 빼면서도 화염병은 반드시 바닥에 던지며 독재 타도를 외치던 그 시대를 더욱 아득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을 쏟으며 바랐을까. 우리의 후배는 최루탄 냄새를 맞지 않기를,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르지 않아도 되기를,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 받지 않기를, 맞아서 죽는 일이 없기를, 그리하여 학생은 공부하고 경찰은 나쁜 놈을 잡고 서점 주인은 책을 팔고 소주병은 소주병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말이다.

 

 

87년과 91년의 룸서울은, 2022년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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