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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헬멧 - Rooms Vol.1

in 세종S씨어터, 2019.01.19 3시, 5시



 


룸서울 3시 빅룸, 5시 스몰룸. 양승리, 김보정, 한송희, 이정수, 김슬기.

 


예매처의 작품 설명에는 "4개의 공연은 이어지거나 통일된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4개 혹은 2개의 공연을 보아야 공연의 완결성을 갖는 것은 아니며, 이 중 어느 것을 먼저 보거나, 하나만 보아도 무방하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나의 공연만 보아도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결성을 가진다는 이 설명처럼, 빅룸과 스몰룸 각각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별개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빅룸과 스몰룸을 전부 목격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이야기는 만나지 못한 것이다. 벽을 사이에 둔 분리된 공간에서 각기 진행되는 상황과 감정과 대사를 알아야, 극을 관통하는 주제와 구성과 소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빅룸과 스몰룸을 차례로 관극하고 나서야, 하나의 온전한 극을 관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룸서울의 경우 빅룸을 먼저 스몰룸을 나중에 보는 것을 추천한다. 빅룸에 앉아 벽 너머에서 진행되는 사건을 짐작한 뒤 마주하는 스몰룸의 이야기가, 흩어져있던 퍼즐 조각이 착착 맞아들어가는 희열을 선사했다. 보다 한정된 정보만을 접할 수 있는 폐쇄적인 스몰룸부터 보는 경우, 빅룸에서 진행되는 큰 틀을 추측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재의 활용과 전개에 따른 극적인 감상을 위해서는 역시 빅룸부터 만나는 편이 낫다. 여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연속 관극까지 권해본다.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방만 보는 건 아무래도 아쉽다.



87년, 그리고 91년. 시공간을 공유하고 겪어내며 이어지는 이야기. 공감가고, 고통스럽고, 유쾌하고, 아프고, 벅차고, 눈부신 대사 하나하나의 무게가 묵직했다. 배우고 목격하고 기억하고 참여해온 민주주의의 역사가 생동하는 인생의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듣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단어, 보는 것조차 힘에 겨운 폭력으로 인해 자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가볍지 않게 풀어냈기에, 힘들지만 꿋꿋하게 극 안의 사람들을, 그 인생들을 목도할 수 있었다. 방은 여전히 존재한다. 바로 저 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금 저 방에 있는 사람들은, 왜 아직도 그곳에 있어야 하는가.





※스포있음※



빅룸 91년에서 헬멧A가 테이블 모서리에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들이 가슴을 후벼팠다.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 같은 이들은 권력이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단언. "왜? 편하니까." 학생이든 노조든,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저 단순하게 폭력으로써 제압하면 된다. "편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소비될 믹스커피처럼, 하얀 헬멧으로 상징되는 억압과 폭력 또한 "편하기 때문에" 존속될 수밖에 없다는 그들의 논리. 역사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어 온 오만한 힘의 궤변. 그리하여 정의는, 옳음은, 정당함은, 늘 어렵고 힘들게 달성될 수밖에 없고, 온 힘을 다해 정성껏 유지해야만 한다.



하얀 헬멧이 자청하여 비유한 '믹스 커피' 는 이 에피소드의 큰 얼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빅룸 87년과 91년에서 전경이 입에 올린, "커피를 참 잘 타" 는 쁘락치. 그리고 스몰룸 91년에서 "커피를 너무 잘 타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전투조 미친개. 커피를 너무 잘 타서 꼬리를 밟혔다는 말에 어이 없어 하는 쁘락치를 향한 분노를 차마 온전히 쏟아내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앉아 허탈한 듯 토해내는 말. "얼마나 커피를 많이 탔으면, 얼마나 이걸로 니가 욕을 많이 먹었으면 이래 됐지. 너무 웃기잖아. 근데 나는 너무 슬프더라고. 니가 커피를 너무 잘 타는 게, 너무 화가 나고 슬펐어." 용서할 수 없지만, 너무 밉고 아프지만, 그럼에도 그 치미는 분노 위에 차오르는 것이 공감과 연민인 '인간' 이기에, 우리는 그들과 똑같아질 수 없다. 직격으로 날아드는 최루탄에 괴로워하고, 곤봉으로 얻어 맞고, 피를 철철 쏟아내고, 남영동과 남산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해도, "사람이 아니라 바닥에" 화염병을 던지며 오로지 몸 하나만을 부딪히며 연대하고 저항해온 역사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다. 



"니가 너무 이해되고, 내가 너무 이해되고. 다 알겠다. 나는 니 같은 새끼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싸울 거다." 라는 대사 또한 민주주의의, 정의의, 연대의 정신이다. 87년 빅룸에서 백골단이 서점 주인에게 "신념이 있으면 의심을 안 하더라고. 의심하면 운동 같은 거 못하거든. 그놈의 연대의식이 뭔지!" 라고 비아냥 대며 했던 말은, 운동의 정체성이자 핵심이자 존재의의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인간이 인간을 위해 모였기에 서로 신뢰하고 연대하고 의지하고 믿으며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91년 스몰룸의 문이 열리기 전, 학생이 프락치 노릇을 한 여경에게 말한다. "내가 니 마지막 기회였다는 거 진짜 유감이다. 근데 니는 나를 잡아 넘기고도 또 다른 나를 잡아서 넘겨야 했을 거야. 저 방은 그런 방이니까!! 헬멧 벗을 기회 있었어. 근데 니가 모른 척 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는 수 년 전 이곳에서 선배에게 약속한 대로, "검은 띠 땄다!!" 라고 외치며 백골단에게 달려든다. "분명 나갔는데, 이 방을 나간 적이 없다." 하며 자신이 포대자루를 뒤집어 쓰고 있던 곳을 울먹이며 바라보던 그는, 문 근처까지 뛰어가 남아있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허공으로 치켜든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서점은 책을 팔고, 경찰은 나쁜 새끼들 잡아가고, 소주병은, 소주병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줄라고!" 운동을 시작한 선배의 마음처럼,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의지를 담아 말한다. "학교에서 보자!" 라고.



커피를 타도록 강요받는 여성으로서의 공감대를 놓치지 않고 이어가는 연출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문선시범을 언급하며 춤추는 건 여자만 시킨다는 문제제기와, 영화 '에이리언2' 에 대한 상충되는 관점 등이 극의 전개에 매끄럽게 포함된다. 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이고, 거기에 예쁘지도 않고, 심지어 외계인도 알을 낳는 암컷이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 라는 편협하고 무식하고 무지한 편견을 빅룸에서 듣게 만들고, 그에 대한 합리적이고 실용적이며 마땅한 반박을 스몰룸에서 들을 수 있게 해준다. 핵심 역할을 여성에게 부여한 점, '여성이기 때문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충과 문제를 짚어내고 극의 중요한 테마로 설정한 점, 무엇보다 소수자에게 소수자라는 이유로 국한됐던 지위만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극을 더욱 높게 평가해본다.  





상기 인용한 대사 일부는 2017 더헬멧 대사봇 을 참고했다. 매번 고민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연극을 다양하게 관극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기억하고 풀어내고 해석하는 후기가 아니라, 파악하고 분석하고 조율하는 비평을 쓰고 싶다. 다양한 컨텐츠를 접하고 더 다각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다. 그래야 창작을 시도라도 할 수 있을텐데, 역시 그 단계에 이르려면 관극이 아니라 수업을 들어야겠지. 여러모로 번뇌가 넘실대도록 만든, 깊이감 있는 관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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