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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헬멧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2022.05.28 3시, 5시

 

 

 

 

룸알레포 3시 빅룸, 5시 스몰룸. 정원조,김주연, 김지혜, 이정수, 현석준.

 

 

지난 2019년에는 룸서울만 만나서 룸알레포가 늘 궁금했으므로, 이번 시즌은 알레포부터 잡았다. 이전 시즌 극장은 세종이었기에 공간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고, 시리아 내전이라는 극 중 배경 때문인지 해당 연도에 홍아센 소극장에서 본 연극 벙커가 많이 생각났다. 벙커는 언제 돌아오려나.

 

 

룸서울은 빅룸 먼저 보고 스몰룸을 보는 것이 좋다고 이전 시즌 후기에 남긴 적이 있다. 룸알레포도 빅룸 먼저 보고 연달아 스몰룸을 관극했는데, 룸서울과 달리 스몰룸을 먼저 보고 빅룸을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빅룸을 보고 스몰룸을 만났기에, 스몰룸의 디테일에 더 날카롭게 감명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몰룸에서는 중간중간 빅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대사들이 크게 들리는 반면, 빅룸에서는 스몰룸의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는 대신 '아이가 있다' 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아이(들)의 함성이 가끔씩 들려온다. 스몰룸을 먼저 봤다면 벽 너머의 상황을 가늠하며 극의 주제를 앞서 경험했을 테지만, 빅룸을 먼저 봤기에 이야기의 큰 얼개를 이해한 다음 세세한 디테일을 주워 담으며 극을 스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어느 순서이든, 빅룸과 스몰룸 모두를 만날 필요가 있다.

 

 

"사람 하나 살리는 거, 그거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

 

 

룸서울의 헬멧과 룸알레포의 헬멧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있다. 룸서울의 하얀 헬멧, 백골단은 '편하기 때문에' 권력이 이용하는 억압과 폭력이다. 반면 룸알레포의 하얀 헬멧, 화이트 헬멧은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생명을 구조하는 인간성이다. 사람 하나 혹은 여럿을 죽이기는 쉬우나 사람 하나를 구해내는 건 너무나도 어렵고 고된 일이라는 대사가, 옳은 일이 더 벅찬 현실의 잔혹함을 여실히 느끼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인간은 마음을 갉아먹으면서도 온몸을 내던진다. 한 명이라도 무거운 돌무더기 밑에서 끄집어내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보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로 돌아간다. 

 

 

 

 

룸서울과 룸알레포를 관통하는 소재는 하얀 헬멧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커피. 믹스커피의 편리함과 지나치게 맛있는 믹스커피가 룸서울의 빅룸과 스몰룸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룸알레포에서 커피는 제대로 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꼭 챙겨 마시는 음료이자 누군가를 대접할 때 일상적으로 권하고 마시며 마음을 나누는 매개체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스테인리스 기구에 커피가루를 넣고 물을 부은 뒤 열기가 있는 평평한 모래 위에 올리고 천천히 둥글게 움직이며 커피를 만드는 모습이 첫 장면과 스몰룸 두 번에 걸쳐 등장하기까지 한다. 빅룸에서는 시리아가 커피를 전세계에 전파시켰노라며, 시리아가 또 어떤 것을 세계에 퍼뜨릴지 궁금하다고 애써 희망차게 말하는 화이트 헬멧 대장의 대사가 있다. 커피는 "축구를 안 좋아하는 시리아 사람도 있나?" 라고 언급되는 축구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사람들의 일상이자 삶이다.

 

 

"저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넌 어른이 될 거야."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던 아홉살 소년이 말한다. 사실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조각나 바스러지는 마음을 끌어안고 어른이 말한다. 너는 어른이 될 거라고. 참담한 현실 앞에서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끝나리라 믿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지금 서있는 곳에서 끝없이 분투하는 목적.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아이들이 폭격하러 온 비행기 대신 축구공을 닮은 비눗방울을 시야 가득 담을 수 있기를, 불안과 걱정 없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기를, 그리하여 생존이 아니라 꿈을 바랄 수 있기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세계 각지의 전쟁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참상을 목도하고 종전을 요구해야만 한다. 가까이 있지 않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그들의 아픔은 결국 모두의 것이 될 것이기에. 보고 듣고 아파하며 고민을 거듭하게 만드는 극이다, 더 헬멧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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