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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드

in 예스24스테이지, 2021.08.26 7시반

 

 

 

 

김종구 나레이터, 이기화 하프 뮤즈. 일리아드 자셋자막.

 

 

윱나레의 무대는 담백하고 정갈하다. 작은 책상 위에 술 두어 병과 라디오가 놓여있고, 그 라디오에서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무대 왼편 뮤즈의 하프 옆에 투구가 걸려있다. 무대를 서성이며 동전을 툭툭 바닥에 떨어뜨리던 윱나레는, 공연을 시작한다고 말하는 어셔를 잠시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흘러나오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을 입모양으로 망연히 따라부르던 그가 라디오를 끄고 일어선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겁디 무거운 발걸음과는 사뭇 다른, 과하게 밝은 얼굴로 지나치게 발랄한 목소리로. 얼굴의 온 근육을 사용해 아이처럼 웃는 그 역시, 전쟁을 온 몸으로 겪어낸 소년병이었다.

 

 

"매번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었으면 해."

 

 

윱나레는 "이름 났고," 하며 오른팔을 펼치며 그리스 함선 쪽을 가리키고선 "이름 나지 않은 사람들" 하며 왼손으로 객석의 관객을 가리킨다. 그는 "여러분," 이라는 호칭을 극 내내 아주 많이 반복하며 청자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기를, 아니 조금이라도 상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생생하고 참혹한 광경을. 걷잡을 수 없는 광기에 휩싸여 적들을 학살하는 파트로클로스는 발작적으로 투구를 쓴 제 머리 오른편을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친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에서 갑옷을 벗겨내며 "어떻게? 짐승처럼! 어떻게? 야만적으로!" 하고 안광을 번뜩이며 으르렁댄다. 웅나레와 석정나레는 지나친 몰입에서 문득 벗어나면 청자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미안해" 라고 사과했는데, 윱나레는 한참을 파들거리다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미안해" 라고 중얼댔다. 마치 제가 총을 겨눴던 누군가를 응시하듯이. 지쳐서 축 늘어진 어깨로 쭈글쭈글해진 겉옷을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뒷모습에 닳고 닳은 절망이 뚝뚝 흘러내린다.

 

 

"더웠어"

 

 

전쟁을 나열하는 장면은 세 나레이터 모두 완연히 다르다. 이전 후기에서 언급했듯, 석정나레는 마치 예언을 하듯 속도와 고저를 바꿔내며 다채롭고 맹렬하게 역사를 관통하는 수많은 전쟁들을 노래한다. 웅나레는 이름들을 나열할수록 점점 더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비극이 지금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윱나레는 스스로를 도려내듯 날카롭게 아파하고 슬퍼하고 공포에 새파랗게 질려가며 힘겹게 노래한다. 수많은 이름들 중간중간 "더웠어" 라고 정신없이 중얼대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발작적으로 오른뺨과 턱의 땀을 손으로 닦아낸다. 아니, 피일까. 정점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정확히 트라우마를 건드린 듯한 얼굴로 비명처럼 2차 세계대전을 입에 올리는 윱나레는, 노래하는 것을 넘어서 그 모든 전쟁들을 실시간으로 돌이켜 경험하고 괴로워한다. 보는 사람마저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과호흡과 공황장애의 증상들이 나레이터의 고통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니 어찌 치욕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토록 오래 기다린 후에 빈손으로 돌아가다니."

 

 

극 초반 일리아드의 시구를 노래할 때 윱나레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선 자신의 생각을 담아 청자인 "여러분"에게 직접 말을 할 때는 눈을 마주한다. "이게 어떻게 치욕이야? 집에 가고 싶은 게 치욕이야?" 라고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묻는다. 인간을 사랑하는 그는 신에게 관심이 없다. 웅나레가 열렬히 증오하고 석정나레가 지독히 원망하는 신들을, 가볍게 응시한다. 이 시대에 신들은 이름이 잊힌 채 인간의 마음 속에 굴을 파고 들어와 욕망 그 자체가 되었을 뿐인 존재다. 하지만 단 한 순간 폭발하듯 분노하는데, 바로 제우스가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영혼을 저울질 하는 순간이다.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혼신을 다해 분노한다. 왜 감히 인간의 운명을 그렇게 가벼이 정하냐는 듯. 윱나레는 프리아모스 왕을 안내하는 헤르메스 또한 언급하지 않는다.

 

 

나레이터마다 디테일이 많이 달라서 전부 언급하기가 힘들다. "몸부림치며 하데스의 집으로 나아갔다" 라며 죽음을 노래할 때, 웅나레는 비통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석정나레는 타로카드를 툭 떨구며 윱나레는 몸을 파르르 떨다가 애도하듯 동전을 던진다. 윱나레의 동전은 하데스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스틱스 강의 뱃사공에게 건넬 노잣돈이다. 석정나레의 타로카드는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한다. 극 시작 전 어셔의 눈치를 보며 웅나레가 껍질을 깎고 베어무는 사과는 일리아드가 노래하는 트로이 전쟁의 시발점인 황금 사과를 은유한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청자들에게 "이걸 볼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라고 말하며, 헥토르가 헬렌을 돌려주고 트로이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 나누어 전쟁을 끝내는 생각을 노래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이거잖아, 우리가 바라는 거, 라고. 웅나레는 트로이와 그리스의 두 병사가 술집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마치 과거를 회상하듯 전쟁터 한가운데에 내려앉아 잠시 적의를 가라앉게 만들었던 새의 이름으로 논쟁한다. 석정나레는 "여긴 나만 아는 곳"이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여기 있자" 라고 설득한다. 윱나레는 이런 평화를 상상하는 장면이 없다. 프리아모스 왕의 간청도 색감이 다르고, 일순 그 형형하던 분노를 놓아버리는 아킬레스의 얼굴 또한 다르다. 웅나레만 "분노를 놓아버려" 라고 말하고, 석정나레와 윱나레는 "분노를 지워버려" 라고 말한다.

 

 

아들을 잃은 프리아모스와 친구를 잃은 아킬레스와 고된 전쟁의 피로에 휩싸인 병사들과 심지어는 신들마저 잠이 든 고요한 밤에, 오직 나레이터만이 깨어있다. 웅나레는 아무도 깨우지 않겠다는 듯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기고, 석정나레는 가만히 평화를 응시하며 녹아들며, 윱나레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손 안의 동전을 굴리며 허공을 응시한다. 평안한 찰나조차 허락받지 못한, 지독히도 외로운 잠 못 이루는 밤. 그 얼굴과 실루엣이 짙은 잔상을 남긴다.

 

 

"생각해봐. 한 인간이, 아니 한 도시가, 아니 한 문명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 마치.. 카불."

 

 

전쟁이 남긴 허망함을 애도한 웅나레, 전쟁이 야기한 인간의 두려움을 연민한 석정나레, 전쟁 그 자체를 고스란히 되짚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윱나레.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나레이터들. 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전쟁나열씬 마지막 "미얀마" 뒤에 "카불"을 더한 윱나레의 읊조림이, "당신이 없었잖아!!" 라는 석정나레의 비명이, "상상할 수 있어? 아니. 상상할 수 있어." 라는 웅나레의 단언이, 심장에 내리 꽂힌다. 기억하고 경계하고 반성하고 다짐해야 한다. 인간은 더 이상 이 참혹한 비극을 반복해선 안된다고. 나레이터의 이 노래를,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라는 이 이야기를, 끊어내야 한다고. 일리아드를 노래하지 않아도 될 그날까지 일리아드는 노래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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