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일리아드 (2021.08.20 7시반)
일리아드
in 예스24스테이지 2관, 2021.08.20 7시반
황석정 나레이터, 김마스터 기타 뮤즈. 일리아드 자둘.
동일한 텍스트가 연출과 배우 노선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니.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침낭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다가 부스스 일어나 사과를 깎아 베어 무는 웅나레와 객석의 관객에게 타로카드를 하나 골라보라 권하고 의미를 풀어주는 석정나레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헬라어로 서두를 시작한 석정나레는 대사에 고저를 넣어 리듬감 있게 흐름을 타고, 지친듯 무심한듯 입을 뗀 웅나레는 청자를 끌어들이고 설득하면서 점차 끓어오른다. 다채로운 색감을 덕지덕지 엮어내는 석정나레와 무채색과 핏빛만으로 채워내는 웅나레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본질을 노래한다.
석정나레는 예언자다. 마치 딱 한 번 언급된 카산드라처럼. 오른쪽 손목의 팔찌를 찰랑대며 굿을 하듯 아킬레스를 노래하고 판소리를 하듯 한탄하고 노래하듯 대사에 멜로디를 붙인다. 적극적으로 뮤즈와 소통하고 거세게 발을 구르며 몰입을 높인다. 헥토르가 돌아간 전쟁터를 가득 메운 시체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테이블을 확 쓸어 타로카드를 바닥에 흩뿌리는데, 그 카드 한 장 한 장이 삶 하나하나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석정나레는 파트로클로스의, 헥토르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타로카드를 툭 떨군다. "이토록 오래 기다린 후에 빈손으로 돌아가"는 "치욕"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리멸렬하게 계속된 9년을 체감케 하는 석정나레의 언어적/비언어적 묘사가 청자들을 압도한다. 돌아온 남편을 향해 "당신이 없었잖아!!!!" 라고 비명처럼 소리지르고 침잠하는 석정나레의 표정이 지독히 아득하고 망연하다.
"죽음이 이내 그를 덮쳤다.
종말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사지를 떠난 영혼은
몸부림을 치며 하데스의 집으로 나아갔다."
트로이 전쟁부터 미얀마까지, 전쟁을 나열하는 장면에서 석정나레는 예언을 하듯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강렬하게 그 수많은 장소들을 말한다. 그가 입에 올리는 모든 전쟁들은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일이자 미래에 일어날 일로써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반면 점점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웅나레가 묵직하게 한 음절씩 눌러 말하는 전쟁들은 지나온 과거이자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의 절망이다. 한 걸음 비켜선 채 노래하다가도 순간적으로 깊이 공감하고 연민하는 석정나레와 다르게, 웅나레는 이미 모두 잃어 초탈한듯 담담하다가도 일순 끝없는 허망감에 휩싸여 더없이 비통하게 노래한다. 석정나레가 살아 숨쉰 이 이야기를 청자들이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웅나레는 서걱서걱 흩날리는 모래와 뜨거운 공기를 청자들이 온몸으로 함께 느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모든 불화가 사라질 수 있다면"
웅나레의 뮤즈 퍼커션은 아킬레스의 새 투구를 묘사하는 장면의 그 장엄함이 압도적이었다면, 석정나레의 뮤즈 기타는 날카롭고 명징하게 불어넣는 이야기의 볼륨감이 짜릿했다. 누군가가 하데스의 집으로 나아갈 때마다 세 차례에 걸쳐 끊어내는 음으로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네모반듯한 기둥들을 받치고 있는 바닥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는 투구들이 차디찬 청동의 질감을 지닌 전쟁의 냉혹함을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웅나레가 말로써 묘사하고 석나레가 카드로써 상장한 그 수많은 소년들의 시체들이, 중앙 무대의 흙바닥 위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웅나레는 전쟁이 남긴 허망함을 애도하고, 석정나레는 전쟁이 야기한 인간의 두려움을 연민한다. 차주에 만날 윱나레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노래할까. 이들의 노래가, 언젠가는 정말로 끝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