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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03.25 7시반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최수진 알돈자, 정원영 산초, 김대종 여관주인/도지사. 류동키 충무 첫공, 자여덟.

 

 

대전예당의 무대와 객석 간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2주만에 보는 건데도 한 달만에 만난 것 같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충무가 샤롯데보다 가로로 넓은지라, 중블 1열 왼통에 앉았는데도 샤롯데 사블통 정도의 체감이었다. 무대가 높고 단차가 좋아서 중블 3-4열이 딱 좋을 것 같긴 하다. 음향은 깔끔하긴 한데 답답했다. 오케 반주와 목소리가 모이며 어우러지는 게 아니라 넓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케 진짜. 대전에서 화해했다고 믿었건만, 오버츄어 "빰바밤" 하고 시작하는 첫음부터 맥아리가 없는데다가 맨옵라 부분에서 관악기 삑사리를 대체 몇 번을 냈는지 모른다. 샤롯데에서도 만족스러운 오버츄어를 들은 기억은 없지만, 정말 역대급으로 최악인 오버츄어였다. 오버츄어가 전하는 힘이 유난히 큰 극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삐걱댄 오케로 인해 1막 내내 평소보다 감동이 덜해서 속상했다. 

 

 

 

 

첫공답게 힘을 딱 주고 무대 위에서 즐겁게 날아다니는 류동키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로운 극장이어서 그런지 배우들 디테일도 여럿 바뀌었더라. 1막 위대한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의 "그날이, 그날이 오기만 허면~~" 라는 대사와, 2막 무어인들이 퇴장한 뒤 "잡았다!" 하며 양손으로 장갑을 잡고선 "왜 내 장갑이 여기 떨어져있냐~" 하는 중얼거림에 멜로디를 붙여 부르는 류동키 디테일이 너무 귀여웠다. 물건 찾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한국인 정서랄까. 페드로에게는 "이 벌레만도 못한 '벌레' 놈아!" 라고 말했고, 산초를 향한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는 법이다" 라는 꾸중도 "똥개 눈에는 똥만 보이는 법이다!" 라고 바꿨다. 기사책봉씬에서 힘들다고 계속 궁시렁대는 류동키에게 빅벨영주가 벌컥하며 "좀 힘들어도 참아요! 기사 되기 쉬운 줄 알어!" 라고 승질을 내자, 순간 어이없음이 스쳐간 류동키가 "진짜 힘들어요!" 하고 말대꾸를 했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레이디" 라고 호명하며 숮돈자의 얼굴에 제 얼굴을 맞댈듯 가까이 다가서서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소" 라고 말하고, 2막 마지막에 햇초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며 "용기를..!" 건네는 등 류동키의 퍼스널스페이스가 확 줄어들었다. 체스씬에서 "문제의 기사, 나이트!" 하며 직각으로만 움직인다고 설명한 뒤 "아주 고상하죠"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살짝 치켜든 표정이 한층 더 적나라하게 비아냥을 담아냈다. 한껏 예의를 차리며 자리를 안내하는 손짓까지 우아하면서도 고압적이었다. 더 아래에 있는 진짜 감옥의 바닥 입구가 무대 중앙에 있던 샤롯데와 다르게, 왼블 바로 앞쪽 오케피트 라인에 위치한다. 그래서인지 끌려나가며 "살려주세요" 라고만 하던 죄수가 세류반을 지나치면서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부분이 생겼다. 죄책감과 무력감을 극대화하는 그 목소리에, 세류반테스는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치다가 털썩 상자 위에 앉고선 왼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스포있음※

 

 

1막 임드 직전 날 똑바로 보라는 알돈자를 곧게 응시하며 "나는 이미 그대를 알아보았소" 라고 확신에 차 말하던 류동키가, 2막 알돈자 직전 처참한 모습으로 절규하듯이 날 똑바로 보라고 하는 알돈자를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여전히 그대는 나의 둘씨네아요" 라고 울먹이듯 중얼댄다. 동일한 구도로 비슷한 대사를 하고 있으나 완전히 다른 두 장면의 차이가 유난히 극적이었다. 1막 빨래터씬을 설명하며 기사라면 누구나 마음 속에 모시는 레이디가 있다는 세류반의 말과 2막 침대씬에서 류동키에게 "당신은 나의 기사님이예요" 라고 말하는 알돈자의 말이 포개진다. 돈키호테에게 있어 알돈자가 자신만의 레이디였듯이, 알돈자 역시 돈키호테가 자신의 기사님이자 꿈을 일깨워준 이라는 이 양방향의 관계성이 짙고 강렬했다.

 

 

계단을 오르기 전 "신이여, 신이여 도우소서" 하고 기도할 때, 세류반테스는 대람차 막공처럼 왼쪽 손바닥을 객석으로 향해 곧게 들었다. 눈을 감지 않고 올곧게 하늘을 응시하는 그는 이미 단단했다. 알돈자의 선창에 놀라 뒤를 돌아본 세류반이 목소리를 더해가는 죄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걸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문 밖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눈가를 손으로 가리는 평소의 동작 없이, 밝은 빛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그의 옆모습에서 희망과 용기가 넘실댔다.

 

 

 

 

임파서블 드림. 알돈자를 따뜻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세상은," 하고 운을 띄우는 류동키 음성의 음색과 공명감이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듯 투명하고 청아하여 심장이 떨린다. 신선계에서 신선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소리가 아닐까. 충무 연장공의 첫걸음을 함께 할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었고, 앞으로 두 달 동안 무사히 안전하게 막공을 맞이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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