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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03.31 7시반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최수진 알돈자, 이훈진 산초, 서영주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자아홉.

 

 

자칫하면 표를 날릴 수도 있던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어찌저찌 해치우고 미뤄서 늦지 않게 객석에 앉았다. 지난 시즌까지 더하면 벌써 15번째 관극임에도, 마치 처음 만나는 듯한 설렘을 장면 곳곳에서 느낀 날이었다. 도지사에게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던 원고가 세르반테스에게는 값비싼 자산이라는 첫 장면의 차이가 평소보다 강렬히 와 닿았고, 극중극을 끝낸 뒤 돌려받은 원고를 꽉 끌어안는 순간 다 함께 만들어낸 이야기가 어둡고 희망 없던 지하감옥을 환하게 밝히는 인상을 받았다. 이날 무대 위 라만차의 기사들이 모두 영광을 좇는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심금을 울렸다. "악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기에 "영광을 향해" 끝없이 달려드는 기사 류동키와, 그가 알려준 빛을 잃을 수 없기에 "그 영광을 다시 내게 보여" 달라고 간청하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숮돈자가 지닌 영혼의 질감이 너무나 닮아있었다.

 

 

커튼콜의 이룰 수 없는 꿈이 3월 관극 중 가장 마음을 울렸다. 류배우님이 정성껏 부르는 한 소절 한 소절이 어찌나 심장에 사무치던지.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말하는 세르반테스이자 돈키호테이자 배우 류정한의 목소리가 영혼을 흔들었다. 게다가 컷콜 중간 인사의 지휘 손동작은 황홀하게 우아했고, 임드를 마치고 왼손 오른손으로 슥슥 객석을 가리켜주는 손동작이 마치 이 공연은 관객 또한 함께 만든 것이라는 감사 인사 같아서 더욱 마음이 벅차올랐다. 마지막 양손 손키스까지 더없이 고맙고 기쁘고 행복했다.

 

 

 

 

※스포있음

 

 

수진돈자의 노선과 그 안의 섬세한 디테일들이 무척 좋아서 갈수록 알돈자에게 몰입하게 된다. 첫만남에서 "천한 여종이나 몸종의 이름" 아니냐는 돈키호테의 말을 듣고, "이봐요" 하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선 "그게 내 이름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디테일을 샤롯데 공연 때부터 좋아했다. 빨래터씬에서 햇초 말에 본인 머리에 있는 거미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확인하고 버리는 거나 훈초 나팔을 꽈아악 손으로 틀어막는 등 각각의 애드립에 맞춰서 디테일하게 반응해주는 것도 깨알같이 귀엽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존댓말과 반말을 어색하지 않게 적절히 섞어내며 돈키호테와 그의 미친 짓에 대한 알돈자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아내는 디테일을 완전 사랑한다. 슬픈 수염의 기사 넘버가 끝나고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듯 양손을 돌리듯 휘젓다가 "아, 아름다운! 이름이예요" 하고 어색하게 웃는 디테일이, 평소 그의 삶에 얼마나 칭찬과 존중과 기쁨이 없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씬에서 돌변하는 공기를 마주하는 찰나의 연기도 좋다. 샤롯데에서는 찬물을 확 뒤집어쓴 깨달음과 공포가 강했는데, 충무에서는 꿈이라는 환상에 휩싸여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일순간에 깨달으며 자신을 향한 조소를 먼저 내보이더라. 알돈자 넘버에서 꿈을 얘기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나 제발 그만하라며 양손으로 싹싹 비는 고정 디테일도 최고다. "아니야아아악" 하며 바닥에 쓰러진 뒤 그대로 엉엉 육성으로 울음을 토해내는 건 충무 공연에서 처음 봤는데, 그 앞에서 엉엉 우는 류동키의 울음소리와 포개지며 한층 극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즉흥으로 해보겠다는 세류반과 시선이 맞닿자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디테일 덕분에 너덜너덜해진 감정선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 집에선 예의라는 게 있네!" 라는 류동키 말에, 자신을 붙잡고 있는 까라스코를 보며 "제발" 이라고 부탁하는 디테일도 충무 공연에서만 봤다. 침대씬의 목소리, 호흡, 손동작, 표정, 눈빛 모든 것들이 상상하던 알돈자 그 자체다. 둘씨네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제 입술에 얹어보는 떨리고 어색한 목소리가 갈수록 선명해지고 단단해지는 변화가 몹시 눈부시다. "말해주오, 그게 무엇이었는지!" 라는 류동키 부탁에 "제가요?" 하며 놀라는 목소리와, 다급하고 기억을 되짚는 손동작과 눈빛이 절박하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하고 떠올린 뒤, "이거 당신이 한 말인데," 하고 쑥스러우면서도 스스로 신기해하는 표정과 음성이 순수하고 찬란한 영광 그 자체였다. 필경 돈키호테는 알돈자의 바로 이 영혼을 알아봤던 것이리라. 수진돈자를 만날 수 있음이 무척 고맙고 즐겁다.

 

 

 

 

이날 세류반은 류동키에 자기자신을 엄청나게 투영하고 있어서 새로웠다. 2막 중간 죄수가 끌려갈 때 양손으로 양귀를 틀어막는 세류반과, 알돈자의 절규 앞에서 역시 양손으로 양귀를 틀어막는 류동키가 온전히 겹쳐졌다. 그래서 거울씬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세류반테스의 목소리에 엄청난 개연성이 실렸다. 세류반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 돈키호테는 세류반 그 자신이었기에, 역할을 연기하는 와중에 불현듯 작가 본인이 드러나버린 것이다. 독백씬의 호흡도 이전과 조금 달랐고, 늘 비명처럼 날카롭게 외치던 "아뇨!" 라는 부인을 단정적인 어조로 묵직하게 말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류반인데도 불구하고 극중극에 대한 몰입은 더 극렬했기에, 극과 극중극의 긴장감이 팽팽했다.

 

 

이날 류동키 가발 앞머리가 키세스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오고 옆으로 뻗혔는데, 그래서 중간중간 상당히 다른 인상과 이미지를 풍겼다. 맨옵라에서 눈썹과 앞머리가 붙어서 이마가 안 보일 정도였는데 덕분에 약간 젊고 한층 꼬장한 할배 같았다. 넘버 중간에 객석으로 얼굴 들이밀며 몸 터는 디테일이 생겨서 확 몰입됐다. 둘씨네아 넘버 앞부분을 얇지만 청량한 소년미 가득한 목소리로 새롭게 불러서 무척 좋았다. 중반부터 늘 그랬듯 완전히 풍성한 목소리로 돌아서서 넘버의 입체감이 보다 다채로워졌다. 체스씬에서 "아주 고상하죠" 라고 비꼰 뒤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까딱거려서 비아냥이 더해졌다. 기사책봉씬에서 영주영주가 "나쁜 관절의 기사" 라고 애드립을 바꿔서 객석도 다 터지고 류동키도 순간 당황했다가 결국 현웃이 터져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냐아 기사?" 까지 별명을 두 개나 만들어준 영주영주 덕분에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theatreplus_twt, 시어터플러스 21년 4월호 커버

 

 

마지막 장면. 세류반테스가 "용기를" 하고 단호하고 굳건하게 말한 뒤 훈초의 어깨를 한번 더 붙잡듯이 툭 치는 손이, 경건한 목소리로 호명한 신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을 듯 위로 뻗어낸 왼손이, 제가 용기를 건네줬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도리어 용기를 되돌려받는 찰나의 놀란 눈빛이, 계단을 마저 오르기 전 고개를 끄덕이며 끌어올리는 입꼬리가, 원고를 내려다보는 옆얼굴이, 마침내 다시 한 번 굳건히 원고를 가슴팍에 끌어안는 동작이, 정말이지 찬란하다는 표현만이 걸맞을 정도로 눈부셨다. "같이 한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추억을 계속해서 쌓아나갈 수 있어 더없이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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