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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대전 예술의 전당, 2021.03.14 2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윤공주 알돈자, 정원영 산초, 서영주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시즌 자일곱. 류공주 자넷.

 

 

류빅터를 따라 지방공 류랑을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더라. 역병만 아니었더라면 작년 여름에는 맨덜리를 쫓아다녔을 텐데. 대전 예당에서의 관극은 처음이라 기대가 컸는데, 깨끗하고 선명하게 오케스트라 라이브의 전율을 전하는 음향이 최고였다. 대사 부분은 울림이 좀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음향이었다. 중블 2열임에도 샤롯데 6-7열 정도인 거리감이 아쉬웠으나, 2주 만에 새로운 극장의 무대에서 만난 류동키가 잔뜩 신이 나있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행복했다. 청아하고 반듯한 철야기도와 풍성하게 공간을 채워내는 임드와 저 하늘의 별을 닮아 반짝이는 눈빛도 여전히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양손으로 손키스를 날리고 지휘하듯 손을 움직이다 우아하게 귀족 인사로 마무리하는 커튼콜은 볼 때마다 짜릿하다.

 

 

객석 반응이 좋아서 관극이 더 재미있기도 했다.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로!" 하며 맨옵라 넘버를 시작할 때, 무대 위 죄수들과 함께 무대 아래 객석에서도 박수가 나온 것은 이번 시즌 들어 이날 처음 만났다. 공연장 전체가 돈키호테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전율을 느끼게 해주기에 즐거웠다. 서한 마지막 소절을 길게 뽑아내는 햇산초에게 박수가 쏟아지는 객석은 2/11 공연에 이어 두 번째였다. 체스씬에서 "직각"으로 움직이는 까라스코의 동작에 웃음이 나오는 객석도 이날이 두 번째였다. 2-3달 동안 길게 공연하는 서울공과 길어야 1주일 정도 짧게 공연하는 지방공의 매력이 각기 다른 건 이러한 객석의 분위기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감옥 안에서 유죄를 받는다면 "소지품 압수"라는 벌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극중극을 진행할 때도 무대 곳곳에 다양한 크기의 상자들이 놓여 있다. 수감된 죄수들이 가지고 들어온 소지품들이 이 무대가 감옥임을 인지하게 만드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드는 소품이 되는 것이다. 지하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우물과 상자 등 다양한 소품과 무대 배경을 사용하여 장면을 바꿔내는 연출이 매번 흥미롭다. 샤롯데에서는 무대 바닥에서 끄집어 올려지던 여자 죄수가, 대전 예당에서는 세류반테스가 등퇴장 하는 무대 왼편에서 끌려 나왔다. 1막 첫 장면에서 간수가 "진짜 감옥은 더 아래에 있고" 라는 대사 없이 바로 "여긴 응접실이다." 하고 말하길래 실수한 줄 알았는데, 2막의 이 장면을 보는 순간 공연장 무대의 차이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섬세하게 바꿔내는 대사와 디테일이 회전문의 묘미를 더해준다.

 

 

 

 

스케쥴이 맞지 않아 한 달만에 만난 햇산초는 여전히 햇살처럼 눈부시고 사랑스러웠다. 시즌 초반의 디테일들이 한층 깔끔하고 재미지게 정돈되어서 극의 감초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훈산초는 오랫동안 세르반테스의 옆에서 그를 보필해온 든든하고 안정감 넘치는 친우 같다면, 햇산초는 세르반테스의 의지를 존경하고 선망하는 제자 같다. 맨옵라 시작 전 분장 장면에서 이 차이가 두드러진다. 훈초는 수염이 들어있던 상자를 절도 있게 탁 닫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갑옷과 칼집을 입히며, 각 잡힌 군인처럼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탁탁 움직여 무릎을 꿇고 멋지게 창을 바닥에 쿵 세워 준비한다. 반면 햇살초는 부산스럽게 소품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고치는 보조자의 역할을 하다가, 창을 건네기 직전 세르반테스의 오른편에 쪼그려 앉아 다른 죄수들처럼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채 눈을 반짝이며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어리숙한 만큼 주인님을 무한히 사랑하는 훈산초와 귀여움과 발랄함이 넘치는 햇산초를 번갈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진짜 찐 영주인 영주영주도 몹시 오랜만이었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도지사와 나긋하고 친절한 여관 주인의 차이가 명확하여 재미있다. 정석적인 노선으로 다정하고 인간미 넘치는 빅벨영주와 상이한 인물을 적극적으로 연기하는 영주영주의 차이가 쏠쏠하다. 영주도지사의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저음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자세가 멋지고, 맛깔나게 슬픈 수염의 기사를 노래하는 빅벨영주의 목소리가 안정적이다. 각기 다른 매력을 선사해주는 덕분에 거를 캐슷이 없다.

 

 

 

 

※스포있음

 

 

거울 앞에 선 류동키가 세류반테스의 목소리를 내는 디테일이 대전공에서 처음 생겼다. 망연하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제 늙고 초라한 얼굴을 만지던 류동키가 말한다. "나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 슬픈 수염의 기사다!" 극중극의 돈키호테가 꿈꾸고 극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추구하는 이상향으로써, 오직 자신의 정신만을 소유하겠노라 다짐하던 철야기도의 곧고 젋고 반듯한 세류반의 음성으로. 잔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하는 순간 이상을 논하던 목소리로 무너져내리는 이 디테일이 클라이막스의 극적 효과를 높인다. 점차 늙은 알론조의 목소리로 돌아가던 그가 일순 허리를 세우고 창을 치켜들듯 오른쪽으로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외친다. "나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다!" 맨옵라와 맨옵라맆에서 강렬하고 결연하게 행하던 바로 그 동작을 취하며,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듯 류동키의 음성으로. 

 

 

이날 세류반테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이상을 향한 굳건함이 앞섰다. 산초의 어깨를 짚으며 "용기를!" 건네는 목소의 떨림도 적었고,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형제야" 라는 도지사의 말에 죄수들을 둘러보는 눈빛도 단단했다. 자신의 변론을 지켜본 관객이자 함께 극을 만든 동료인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하려 한다. "신이여," 하며 손바닥을 객석으로 향한 채 똑바로 곧게 세운 왼손을 위로 들어올린다. 하늘을 응시하며 그 손으로 무언가를 붙잡아내려는 듯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리며 팔을 살짝 내린다. 그대로 눈을 감으며 "신이여 도우소서," 하고 기도를 끝낸 뒤 팔을 내리고 "우리 모두," 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오른손에 꽉 쥔 원고를 가슴에 꽉 끌어안으며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라고 선언한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그에게 들려오는 노래, 포개지는 목소리들. 죄수들을 하나하나 내려다본 그가 몸을 돌려 환한 빛을 한참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망설임 하나 없는 힘찬 걸음으로 빛을 향해 몸을 던진다. 기꺼이, 용감하게.

 

 

 

 

같은 텍스트에 유사한 감동이건만, 매번 결이 다르다는 것이 고맙고 벅차다. 진정으로 축복 받으신 분, 이 배우의 무대를 마주할 수 있는 이 기적이 매번 경이롭고 감사하다. 충무에서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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