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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샤롯데씨어터, 2021.02.28 7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최수진 알돈자, 이훈진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자여섯이자 샤롯데 막공. 맨오브라만차 800회 공연.
이날이 800회라는 것을 공연 10분 전에 알았는데, 그래서인지 배우들이 이야기를 유난히 정성껏 쌓아 올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따뜻하고 다정하게 위로를 건네는 이날 공연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 같다. 풍성하고 황홀한 류동키의 1막 마지막 임파서블 드림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며 벅찬 감동과 희망에 전율케 했고, 목소리들이 하나씩 모여가는 2막 마지막 임파서블 드림은 공간에 함께한 모든 이들과 함께 극을 완성해내는 기쁨과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샤롯데에서 듣는 커튼콜의 마지막 임파서블 드림은 무대 위 이야기를 현실로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한아름 건네주었다. 심장을 가득 채워내는 벅찬 감동이 이 극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자, 그럼 무대를 만들어볼까요!"
오블 실 1열 통로에 앉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정말 좋았다. 샤롯데 1열을 좋아하는 건 공연장의 극악한 단차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데다가 음향이 다른 자리들에 비해 확연히 크고 선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극중극을 바라보는 극 속의 죄수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무대 위의 이야기 속에 오롯이 빠져들어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마주하고 끌어안는 몰입감이, 이 극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중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옆모습들을 직시할 수 있는 시야각도 행복했다.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 으로 기소당하는 세류반의 단정한 옆얼굴, 가발을 쓰지 않은 검은 머리에 회색 수염을 붙인 찰나의 모습, 거울 앞에서 무너지는 날 것 그대로의 표정 등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각도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미지의 공간과 상황으로 인한 긴장감 때문에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축이는 디테일을 좋아한다. "가장 익숙한 형태" 의 변론을 시작하기 전까지, 세류반테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 가득 묻어났다. 이번 시즌 초반에는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로 이행하는 철야기도를 제외하고서는 돈키호테 그 자체로밖에 보이지 않던 류동키에게서, 어느 순간부터 종종 세류반의 흔적이 엿보였다. 특히 이날은 넘버를 부를 때마다 돈키호테의 외면 너머 그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내면의 세르반테스가 번뜩이는 두 눈동자 속에서 선연한 존재감을 내보였다. 가발과 수염에 가려진 맑고 정연한 세류반테스의 얼굴이 마치 환각처럼 떠오를 정도였다.
※스포있음※
단단한 1막의 돈키호테로 인해 유약하고 불안정한 2막의 세르반테스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끌려가는 죄수의 비명에 경악하여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마신 세류반은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떠오르기라도 한듯 망연하고 허망한 얼굴로 잠시 쉬어야겠노라 말한다.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는 현실주의자의 냉정한 비난에, 자신은 사는 동안 언제나 생을 직시해왔노라며 고통스럽게 제 경험을 나열한다. 자신의 품에서 죽어간 친구들이 "왜 죽는가가 아니라 왜 살았나를 물었으리라" 생각한다는 세류반의 얼굴 가득 죽음에 대한 공포 이상으로 덧없는 생을 향한 절망이 넘실댄다. 그러므로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까라스코를 똑바로 가리키며 "그 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하고 성큼성큼 극중극으로 다시 걸어들어가는 절박하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나는 나 돈키호테!" 라고 부르짖는 외침이 더없이 숭고하게 빛난다.
"가네 저 별을 향하여 / 쉽게 닿을 수 없어도 / 온 맘 다하여 나아가리"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류반테스이기에, 극중극 돈키호테가 "오직 그분만을 위해 행하며, 그분만을 품고 살겠나이다" 라고 바꿔말하는 철야기도의 마지막 소절이 한층 뜨겁게 다가온다. 기사로써의 이상향 둘씨네아를 "믿고 따르"는 대신, "죽음이 덮쳐올 때까지" 가슴에 품고 살아가겠노라는 선언이, 삶을 직시하는 세류반테스의 의지를 견고하게 뒷받침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두려워하기에 "불타죽을 계획은 없"지만 "용기를" 건네는 목소리 가득 옅은 공포감이 배어있는 세류반이 위태로운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신이여," 하며 왼손을 하늘로 뻗는다. 도움을 요청하듯 손바닥을 위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잡아낼듯 세운 채로 뻗어내는 그 손.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 라는 세르반테스의 공언에 터져나오는 답가. 놀란 눈으로 죄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던 세류반은, 열리는 문 너머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응시하며 계단을 걸어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 친구들을 바라보더니 씨익 입가에 미소를 건다. 망설임 하나 없이 당당하고 씩씩하게 양 어깨를 크게 흔들며 빛을 향해 걸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이토록 희망찼던 걸 본 적이 없다. 마지막 임드의 한 소절 한 소절이 이토록 뜨겁게 영혼을 울린 적이, 없었다.
2월 내내 지하감옥에서 함께 할 수 있어 진정으로 감사했고 더없이 영광이었다. 샤롯데에서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디 무사히 대전과 충무에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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