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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샤롯데씨어터, 2021.02.17 7시반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윤공주 알돈자, 이훈진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자넷.
완벽한 레전공은 아니었지만 온전하게 심장을 울린 공연이었다.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을 비판하고 경계하면서도, 결국 그 현실에 발목이 붙들려있는 지식인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세르반테스였기 때문이다. 지독히 공감하고 절절히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무력감과 절망이 너무도 익숙하고 가까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리를 박차고 걸음을 옮기는 의지와 용기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관극의 여운이 길고 짙다.
※스포있음※
이날 극 초반의 세류반테스와 류동키는 이번 시즌에서 만나본 것 중 가장 젊고 불완전했다. "이상주의자, 엉터리 글쟁이 그리고 고지식한 인간으로 기소" 된 그가 "이상주의자? 이상 없이 살 수 있는 용기! 난 없소이다." 라고 변론하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엉터리 글쟁이, 뭐 그 점에 대해선 나름대로 생각이 복잡하지만.." 하고 중얼대며 입꼬리에 건 조소에서 두려움을 애써 감추려는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가장 익숙한 형태로" 변론을 하고 싶다며 시작한 극중극의 돈키호테 역시 이전 회차 공연들보다 덜 늙고 더 패기 가득했다. 맨오브라만차 넘버의 류동키에게서 세류반테스가 이렇게 많이 묻어나는 건 처음이었다. 중간중간 넣는 기합도 평소와 같은 "하!" 가 아니라 "후와!" 하고 좀 더 힘차게 표현하기까지 했다.
알돈자를 둘씨네아라 호명하는 이유 또한 이전과 달랐다. 이날 류동키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알아본" 둘씨네아는, 알돈자의 내면에 있는 고결한 자아가 아니었다. 기사지망생 돈키호테에게 필요한 건 기사 작위를 내려줄 수 있는 지배층과 기사라면 마땅히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할 레이디였다. 일단 성의 영주를 만났으니 그에게 기사 책봉을 청하기 전 그만의 레이디를 만나게 되는 건 너무나 마땅한 수순이었다. 기사에게 필요한 이상향으로써의 레이디 둘씨네아를 알돈자에게 덧씌우는 류동키의 악의 없는 위선 또한 내면에 공포가 깔린 세류반테스만큼 위태롭고 인간적이었다.
알돈자의 진정한 영혼이 아니라 그의 "미친 짓"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알돈자의 호기심을 알아본 듯한 돈키호테는 무척 새로웠다. 다른 사람처럼 제 미친 행각을 비웃고 무시하는 대신, 그 이면의 진의를 궁금해할 줄 아는 상상력을 알아본 것이다. "오르지 못할 산을 꿈꾸며 험한 길도 상관없이" 걸어가는 돈키호테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알돈자 역시 이상주의적 면모를 지녔기에, 말랑하고 눈부시며 추상적인 그의 꿈과 이상에 쉽게 물들어버린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나를 그냥 나로서 봐줄 수는 없어요?"
불가능한 꿈을 꾸는 돈키호테에게 알돈자는 자기 자신을 봐달라고 말한다. 담담한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 담긴 부탁에도, 돈키호테는 여전히 그에게 부여한 둘씨네아라는 "완벽한 여성"만을 응시한다. 희망을 꿈꾸게 되어버린 알돈자가 현실의 가혹함에 처절하게 나뒹굴 때도, 돈키호테가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여전히 그대는 나의 레이디" 라는 헛된 호명뿐이다.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원고에서 조연 알돈자는 주연 돈키호테의 절망을 극대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잔혹한 현실을 강제로 마주하고 추락하는 이상주의자의 모습이 작가가 "아는" 결말이다. 불가능한 꿈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를 지향하지만, 현실 앞에 끝내 그마저 무너졌을 때 그 너머의 희망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이 원고가 불완전한 이상주의자 세르반테스의 한계를 여실히 증명한다.
"나는 둘씨네아예요."
즉흥으로 이어진 극중극은 완전히 새로운 결말을 맞이한다. 수단에 불과했던 알돈자는 대상화된 이미지에 정체되어 있기를 거부한다. 돈키호테의 말들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알돈자는 그의 죽음 앞에서 망연히 좌절하는 대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다. 돈키호테가, 나아가 세르반테스가 부여한 가상의 레이디가 아니라, 그 의지를 계승하는 존재로써의 "둘씨네아" 임을 스스로 선언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 그의 손을 떠나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완성시킨 것이다. 극작가가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을 극중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이끌어내는 것, 완전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꿈을 나누고 공유한 타인으로 인해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그리하여 희망을 건네고 용기를 되돌려 받는 쌍방향의 관계가 가능케 되는 것. 이 작품의 생명력이 극대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이여, 신이여 도우소서."
지하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작가 세르반테스는 결코 이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재판의 소환 명령을 듣고 알돈자 역을 맡았던 죄수를 바라보는 세류반의 눈빛이 다채로운 감정으로 일렁일 수밖에 없었다. 눈을 질끈 감는 대신 하늘을 곧게 응시하며 손을 뻗어내면서도, 세류반테스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두려움을 내비친다. 그런 그에게 들려오는 죄수들의 임파서블 드림. 만인이 평등하다는 국법을 고지식하게 따르는 이상주의자 세르반테스의 삶은 필경 외롭고 쓸쓸하고 고됐으리라.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임드는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적극적인 동조와 진심 어린 지지와 뜨거운 응원으로써 벅찬 용기와 의지를 가득 채워내게 만든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벅찬 희망과 위로가 너무나도 경이롭고 눈부시고 아름답다.
지하감옥의 문 너머 빛 속으로 기꺼이 걸어간 세류반테스는 악이 번성하는 현실 앞에서 계속 절망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 단단하고 정연하며 꼿꼿한 커튼콜의 이룰 수 없는 꿈이 이를 입증한다. 커튼콜을 통해 온전하게 완성된 이날의 지하감옥이 먼 미래에도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 분명하여 행복하다. 영혼에 새겨지는 훌륭한 무대가 감사하고, 심장을 울리는 관극이 가능한 일상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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