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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샤롯데씨어터, 2021.02.03 8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윤공주 알돈자, 이훈진 산초, 서영주 도지사/여관주인, 이하 원캐. 류동키 첫공.

 

 

이 무대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왔던가. 역병으로 인해 개막 연기를 거듭하며 실망과 좌절이 계속되었으나, 길고 길었던 기다림 끝의 만남은 더없이 달콤하고 벅찬 영광이었다. 무대 위 배우들은 열과 성을 다해 온 마음으로 공연에 임했고, 무대 아래의 관객들은 모든 찰나를 오롯이 눈과 귀와 마음에 담았다. 절반 밖에 채울 수 없던 좌석과 함성을 쏟아낼 수 없는 커튼콜이 속상하긴 했지만, 공연장에서 그 공간과 시간을 공유한 모든 이들의 마음은 모자람 하나 없이 충만했다.

 

 

작년 6월 이후로 참 많이도 그리워했던 류배우님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내내 막혀있던 숨통이 탁 트였다. 단정한 얼굴, 명징하고 우아한 목소리, 고급스러운 손동작과 세심한 디테일, 존재 자체만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빛을 내뿜는 배우. 온몸으로 무대를 즐기며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 담아 이야기를 선사하는 류동키가 지나칠 정도로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그럼, 무대를 만들어볼까요?" 라는 대사에 힘을 준 류동키의 목소리가, "현실은 진실의 적이지!" 라며 맑고 영롱하게 반짝이는 류동키의 눈빛이, 반갑고 설레고 떨리고 벅찼다. 2015년 공연과는 다른 류동키가 2015년과 다름없는 미모로 2015년과 달라진 나를 기꺼이 반겨주고 따뜻하게 위로를 건넸다. 첫공임에도 첫공 같지 않은 완벽한 공연이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남기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관극이어서 도리어 글을 시작하기가 힘들다. 주연배우 얘기부터 간단하게 하자면, 빛바랜 천조각 같은 삶을 살다가 돈키호테로 인해 희미하게 원래의 색을 되찾아가는 공주알돈자의 노선이 너무나 취향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짚어내고, 돈키호테와 시선을 맞추며 내려앉는 침묵을 변화의 과정으로 풀어내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특히 1막 마지막 철야기도에서 류동키와의 호흡이 정말 좋아서 편안했다. 도지사일 때와 여관주인일 때의 목소리와 움직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영주영주 역시 거듭 감탄을 자아냈다. 높은 이해도를 기반으로 캐릭터를 설정하고 감칠맛나게 살려내는 솜씨가 최고다. 기사책봉 장면에서 "난 진짜 영주니까!" 라는 디테일에 웃음이 터졌는데, 그걸 또 "영주영주영주~" 하며 받아내는 류동키 애드립도 재미있었다.

 

 

지하감옥의 문이 디큐브보다 조금 낮아진 것 같고, 편곡도 조금 달라졌다. 오버츄어부터 삑을 내는 관악기가 차오르던 감동에 살짝 찬물을 부었지만, 일단 참아본다. 이 작품의 지독한 오점이었던 2막 윤간씬은, 알돈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을 묶은 뒤 더듬고 때리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장면 길이 자체도 짧아졌다. 그러나 농담을 가장하기에 더 역겨운 희롱과 알돈자가 온몸으로 밀쳐내는 힘겨운 뿌리침과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집단 성추행이 1막 내내 거듭 반복되는 연출 자체가 이미 불쾌하고 끔찍했다. 불호 요소가 많고 불편한 연출도 여전해서 여러모로 참 힘든 작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을 아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나 커서 복잡한 기분이다. 

 

 

 

 

※스포 있음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럽긴 했지만, 류동키는 2015년에 비해 확실히 세월과 연륜이 더 묻어났다. 두 개의 장면에서 이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는데, 첫번째는 철야기도였다. 후대의 현인들이 이 역사적인 밤을 어떻게 묘사할지 생각해보겠다며 허영과 자만으로 가득한 문장을 쏟아내던 류동키가, 하하하 쏟아내던 웃음 끝에 눈을 감더니 표정을 거둔다. 그 찰나 류동키는 짙은 풍파를 견뎌내고 초탈하여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노인의 얼굴을 내보였다. 마치 알론조 키하나의 삶이 순간적으로 배어나온 듯이. 미친 기사 돈키호테의 근간은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을 살아낸 시골 지주 키하나임을 일깨우듯이. 키하나의 얼굴로 돈키호테를 자청하며 세르반테스의 목소리로 정갈하게 올리는 철야기도는, 극 중 인물을 빌려 자신의 뜻을 전하는 극작가의 의지로써 객석에 와닿았다.

 

 

두 번째는 기억을 잃은 키하나의 침대 장면이었다. 생명력이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신부님을 부르고 유언장을 쓰겠다는 그 목소리에서, 소름 돋는 죽음의 향기가 뚝뚝 묻어났다. 여정의 끝을 목전에 두었기에 도리어 담담하고 초연할 수 있는 노인이, 새하얀 셔츠를 입고 새하얀 이불을 덮은 채 무력하게 누워있었다. 그저 이야기라는 것을, 그것도 극중극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연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옷자락이 무척 오싹했다. 2015년의 류동키에게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나이듦이 더 짙고 묵직해진 이유가, 배우님도 나도 두 번의 시라노를 겪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주의자라는 비난, 현실을 직시하라는 조소, 눈앞에서 사람이 끌려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이러한 일련의 경험을 거친 류동키는 세상에 자비를 더하기 위해 행한 자신의 정의에 대해 회의감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도지사가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는 형제요." 라며 돌려주는 자신의 원고를 가만히 받아들며 미세하게 변한다. "우리 모두," 하고 원고를 내려다보다 손에 꽉 쥐면서 "라만차의 기사요." 라고 선언한 그는 그대로 그 원고를 품에 가져가 꼭 끌어안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의지를 잃지 않겠다는 듯이.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르는 그에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알돈자의 선창, 신부님과 도지사의 합류, 하나씩 더해지는 목소리, 그렇게 한데 모이는 임파서블 드림. 

 

 

놀람, 의아함, 믿기지 않음, 당황, 감격, 굳건한 의지. 다양한 감정이 차례로 넘실대며 변화하는 류동키의 얼굴이 말한다. 이 노래는 그의 글이, 그가 만든 세계가, 누군가의 삶을 바꿔냈다는 생생한 증거라고. 그가 꿈꾸는 정의가, 그가 바라는 세상이,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바라고 추구하는 '불가능한 꿈' 그 자체가 되었다고 말이다. 오버츄어부터 엔딩음악까지 극 내내 임드는 다양한 장면에서 다양한 가사와 함께 변주되어 불린다. 그 모든 임파서블 드림이 쌓이고 모여 응축되는 이 마지막 장면이 <맨오브라만차>의 진정한 존재 의의다. 

 

 

 

 

관극을 하며 15년도에 정성들여 작성했던 후기의 문장들을 자주 떠올렸다. 커다란 위로가 되었고 그만큼 많이도 사랑했던 작품이어서, 대사 하나 가사 하나가 반갑고 고맙고 아프고 따뜻했다. "꿈을 포기하고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미친 짓이 아닐까요?" 라는 세르반테스의 말이, 미쳐 돌아가는 작금의 현실에서도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커튼콜에서 성악 발성으로 풍성하게 불가능한 꿈을 노래하는 류배우님의 목소리가, 비로소 당연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는 기쁨을 선사했다. 오케 반주에 맞춰 우아하고 현란하게 휙휙휙 오른손을 돌리는 류배우님의 충만한 얼굴이, 오른쪽 다리를 왼쪽 뒤로 보내며 고급지게 허리를 숙이는 귀족 인사가, 그 동작에 딱 맞춰 꺼지는 조명이, 현장감 가득한 공연예술의 카타르시스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짜릿함, 살아있음을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느끼게 만드는 압도적인 쾌감. 비로소 다시 움직인다, 무대 위의 이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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