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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샤롯데씨어터, 2021.02.06 7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최수진 알돈자, 정원영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이하 원캐. 류동키 자둘.
이룰 수 없는 꿈임을 알면서도 기꺼이 몸을 던지는 라만차의 기사가, 그 의지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둘시네아가, 유난히도 시리게 아프고 찬란하게 눈부신 날이었다. 특히 2막 후반부의 처절하고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벅차오르는 모든 장면들이 짙고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첫공만큼 좋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산산조각 내며 첫공을 뛰어넘는 멋진 무대를 선사한 류동키 덕분에 가득 차오른 전율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이렇게 완벽한데 공연이 고작 한 달뿐이라니.
퐁당퐁당으로 공연장 절반만 오픈되어서 자리를 구하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취켓팅을 한 덕분에 공연일 바로 전날에 무려 중블 1열을 잡았다. 결제 완료까지 보고 나서도 손이 덜덜덜 떨릴 만큼 짜릿함이 주체되지 않았다. 공연장에 오라고 표를 하사 받은 건 처음이어서 무척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했다.
※스포있음※
더 나은 삶을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수진알돈자는 분노로만 가득하다. 세상을 향한 적대로 가득한 그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호명이 들려온다. 제게 바라는 것이 다른 남자들과 같은 소유 혹은 정복이 아니라, "그대를 구하는 일" 이라고 말하는 사람. 생전 처음 마주하는 다정함을 이해할 수 없기에 저항해보지만, 그럼에도 이해하고 싶기에 알돈자는 울먹임을 섞어 묻는다. 당신이 말하는 주어진 길이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이냐고.
둘씨네아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하나씩 읊는 류동키의 노선이 첫공과 달라졌다. 공주알돈자와의 첫공에서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향한 벅참이 앞섰다면, 이날은 수진알돈자를 위해 쉽게 풀어내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대사처럼 말을 건네듯이, 문장 하나하나가 스스로에게 돌아와 박히듯이, 류동키는 제가 생각하는 기사의 본분이자 특권을 제 언어들로 엮어낸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하고 첫 문장을 뗀 그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고는 그 순간 생각났다는 듯 "싸움, 이길 수 없어도" 라고 이어간다. 넘버 바로 직전에 알돈자가 "누구랑 싸우든지 깨질걸?!" 하고 비명처럼 외쳤던 비아냥에 대한 대답처럼 말이다. 유난히 늙고 지쳤던 이날의 류동키는 오로지 자신의 사랑, 레이디 둘씨네아를 위해 두려움과 맞서고 슬픔에 굴복하지 않으며 끝내 기꺼이 죽음을 마주한다.
2막 알돈자 넘버에서 공주알돈자는 희망을 엿보았다는 죄목으로 처절하고 끔찍하게 나락으로 나뒹굴었다면, 수진알돈자는 발작하듯 치를 떨며 감히 꿈을 꾼 스스로를 저주하고 그 꿈을 깨우치게 만든 돈키호테를 원망한다. 공주알돈자는 이미 바닥을 보고 왔기에 더없이 처참하고, 수진알돈자는 알돈자 가사 하나하나를 내뱉으며 점점 바닥으로 무너져내린다. 그리하여 돈키호테를 기억하지 못하는 알론조 키하나를 마주한 노선 또한 다르다. 공주알돈자는 그로 인해 꿈꾸게 된 세상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수진알돈자는 그가 그 세상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키하나의 죽음 앞에서 오열을 떨쳐내고 일어서며 저 사람을 잘 모르겠노라 말하는 것 또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주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의지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하며 둘씨네아임을 인정했고, 수진알돈자는 그가 지향하던 세상을 오롯이 꿈꾸게 되었기에 둘씨네아라고 선언한다. 스스로 돈키호테가 되겠노라 결심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진알돈자를 보며, 그가 앞으로 겪어내야만 할 세상의 핍박과 고통이 저절로 연상되며 마음이 미어졌다. 공주알돈자는 내가 바란 완벽한 알돈자였고, 수진알돈자는 나를 투영할 수밖에 없는 애틋한 알돈자였다.
"난 그들이 왜 죽는가가 아니라, 왜 살았나를 물었으리라 생각하오."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은 돈키호테의 최후는, 시라노였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믿는 바를 올곧게 꿈꾸던 이의 최후. "영광을 향해," 하고 그대로 정지한 돈키호테는 짧지만 묵직한 숨을 한번 토한다. 그대로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가 다시 한 번 탄식 섞은 마지막 숨을 토해낸다. 눈부신 영혼이 실린 그 선연한 최후의 숨결. 라만차의 고결한 기사를 꿈꾼 늙은 시골 지주 알론조 키하나는 자신의 바람대로 돈키호테로써 생을 마감한다. 레이디 둘씨네아에게 자신의 의지를 고스란히 넘겨주면서.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형제라는 도지사의 말에, 세류반테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신이여," 라고 호명한 뒤 눈을 질끈 감는다. 그대로 "신이여 도우소서," 라고 중얼거린 그가 죄수들을 둘러보며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라고 명명한다. 자신과 함께 극을 완성해낸 죄수들이 자신을 위해 이룰 수 없는 꿈을 노래하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세류반테스가 뒤돌아 계단을 오른다. 순간 멈칫하며 지하감옥 문 너머 눈부신 빛을 잠시 응시하던 그의 입가에 확연한 미소가 번진다. 그 너머의 세상에 어떠한 비극과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올곧게 마주하리라는 확신을 담은 그 찬란한 미소. 희망을 좇는 그 단호한 발걸음은 얼마나 순결하고 숭고한가.
디테일 하나하나를 앓고 싶은데, 류배우님 관극이 너무 오랜만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배우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기쁨이 차올라서 주체가 되질 않는다. 지나치게 훌륭해서 오히려 글로 엮어낼 수 없는 이 황홀함이 기껍고 즐겁고 황홀하다. 변변치 않은 글솜씨로 기록하여 기억해야 하는 위대한 무대를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이 성량, 이 연기, 이 외모, 박제가 너무나 시급하다.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손을 뻗을 수밖에 없는 이 간절한 마음이 어딘가에는 닿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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