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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샤롯데씨어터, 2021.02.11 2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김지현 알돈자, 정원영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자셋.

 

 

2월 한 달 동안 고작 9회차라니! 지방공과 연장공 소문이 돌고 있지만, 그래도 강제로 취소당했던 모든 표들이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퐁당퐁당이어서 앞자리 잡기는 또 어찌나 힘든지. 류동키와 알돈자 트리플 배우들의 페어첫공을 챙겨야 했기에 적당한 자리에 앉는 것으로 타협했다. 알돈자 배우들이 각기 다른 노선이어서, 류동키의 노선은 물론이고 극 전체의 질감도 완연히 달라지는 것이 즐거웠다. 간만에 도는 회전문이 너무나 재미지다.

 

 

극중극의 돈키호테와 극중극 바깥의 극작가 세르반테스가 혼재된 공연이었다. 무대 위의 관객인 지하감옥의 죄수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호응을 끌어내고, 무대 아래의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듯 시선을 던지며 몰입감을 끌어올리는 건 평소 류동키의 디테일이다. 여기에 더해 이날은 손동작 디테일을 많이 추가했다. 맨오브라만차 넘버에서 "들어라 비겁하고 악한 자들아!" 하고 외친 류동키는 왼손으로 객석을 가리키며 "너희들 세상은 끝났다" 라고 선언한다. 이어 "결투를 청하는도다!" 부분에서도 한 차례 더 객석을 가리킨다. 악이 활개치는 무대 경계선 너머의 세상을 직시하듯이.

 

 

알론조 키하나를 기반으로 한 돈키호테가 점점 더 늙게 표현되는 반면, 그 내면에 결코 스러지지 않는 라만차의 기사이자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닌 의지는 점점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 가녀리고 위태로운 늙은 기사의 목소리로 시작했던 둘씨네아 넘버의 중반부터 완전히 발성을 바꿔내며 중후하고 짙고 풍성한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미친 기사의 목소리지만, 그 너머의 정의를 올곧게 믿고 추구하고 지향하는 기사의 의지가 숨길 수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스포있음

 

 

허영 가득한 수식어에 허망해하며 몸을 잔뜩 움츠린 류동키가 객석을 등지고 무대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좁고 위태로워 보이던 뒷모습을 보이던 그가 허리를 펴고 등을 곧게 세우는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단정하게 걸음을 옮기며 철야기도를 읊는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의 목소리가 명징하게 공간을 울린다. "오직 그분만을 위해 행하며," 하는 마지막 기도에서 비로소 자신의 레이디를 찾아낸 돈키호테의 목소리로 돌아온다. "그분만을 믿고 따르겠나이다" 가 원래 대사인데, 이날은 "그분만을 품고 살겠나이다" 라고 바꿔 말했다.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는 알돈자에게 "그대를 구하는 일"이라 답하며 이어가는 대사와 엮어내듯이. "그대를 마음에 품고, 승리의 영광을 돌리며, 고난 중에 의지하고,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내 목숨을, 둘씨네아 그대를 위해 바치는 것이오." 라는 헌사 말이다.

 

 

주어진 길을 하나씩 읊어내는 임파서블 드림 넘버는 언어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고 황홀하고 눈부셔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하며 대사처럼 시작하는 대답.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고는 "싸움, 이길 수 없어도" 라며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자신의 말에 알돈자가 표한 의문을 다시 한 번 인용한다.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하며 꼭 쥔 주먹을 가슴께에 가져다대는 디테일은, 마지막 침대씬의 리프라이즈에서도 똑같이 행한다. 

 

 

침대 위에서 알론조 키하나로 눈을 뜨고 "좋은 아침입니.." 하며 어미를 채 끝맺지 못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제 인생을 바꿔버린 그를 찾아온 둘씨네아의 절박한 부름에 끝내 다시 깨어난 돈키호테는, "몸도 안좋으신데" 하는 만류에도 몸을 덮고 있던 하얀 천을 걷어내고 두 발로 당당히 일어선다. 그가 희망과 의지를 상징하는 붉은 의상을 되찾은 순간, 차갑고 푸른 색 뿐이던 현실 속에 더없이 찬란한 꿈이 다시 빛을 발한다. 라만차의 기사를 노래하다가 크게 휘청인 돈키호테는 파들거리며 꺼져가는 목소리로 이어가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채 그대로 굳어버린다. 탄식도, 신음도, 한숨도 아닌, 생명이 꺼져가는 숨소리를 한 번, 천천히 무너지듯 무릎을 굽히며 또 한 번 내뱉는다.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은 채 마지막으로 길게 토해내는 그 허망하고 망연한 한, 숨.

 

 

 

 

지현알돈자는 그 동안 만났던 알돈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돈키호테가 이미 알아본 알돈자 내면의 둘씨네아가 관객인 나의 시선에도 닿았다. 더럽고 괴로운 진흙탕 속에서도 여물지 못한 꽃봉오리를 품은 단단한 심지를 지니고 있는 알돈자였기에, 2막의 좌절과 절규가 더욱 날카로웠다. 돈키호테의 죽음 앞에서 다른 알돈자들이 그 절망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면, 지현알돈자는 그 죽음을 자신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삼켜내며 꼿꼿이 몸을 세웠다.

 

 

"나는 둘씨네아예요." 라는 선언을 하는 알돈자의 미래가 각기 다르게 상상됐다. 공주알돈자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으며 늘 자신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연상됐고, 수진알돈자는 스스로 돈키호테를 자처하며 가혹한 현실에 온몸으로 부딪히고 상처 입는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 그려졌다. 그리고 지현알돈자는 지독한 현실 앞에 몸을 굽히지 않으며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만들어낼 것만 같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돈키호테의 의지를 계승하는 알돈자의 변화가, 여전히 마주해야 하는 그들의 험난한 현실이, 그럼에도 이어나갈 진실과 희망이, 이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든다.

 

 

 

 

계단을 오르기 전 세르반테스는 하늘을 응시하며 "신이여," 하고 호명한다. 그리고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왼손을 하늘 향해 뻗어내며 말한다. "신이여, 도우소서." 두려움이 깃든 입가를 단단히 여물며 오른손에 쥔 원고를 품 안에 꽉 끌어 안은 채 선언한다.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라고. 돈키호테에게서, 그리고 돈키호테로 인해 변화한 사람들에게서, 희망과 용기를 건네 받은 그는 밝게 쏟아지는 빛을 응시한다. 알 수 없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의연하고 굳건하게 옮기는 걸음은, 1막의 철야기도에서 이미 만났던 바로 그 발걸음이다.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그 이야기에 감응하고 변화하게 된 우리 모두는, 형제다.

 

 

이 한 몸 찢기고 상해도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저 별을 향해 걷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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