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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키부츠

in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2020.09.29 8시

 

 

 

 

박은태 롤라, 이석훈 찰리, 김지우 로렌, 고창석 돈, 이하 원캐.

 

 

은롤라 첫공을 챙겨보고 싶었으나, 코로나로 인해 개막 직후 공연 중단이 되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자첫자막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띄어앉기를 위해 계속 재예매가 이어지고 좌석 품귀현상이 발생하여 도무지 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지난한 무한산책을 거쳐 아쉬운 대로 당일 오전에 티켓을 예매하고 객석에 앉았고, 은롤라가 첫 넘버를 시작하는 순간 알게 됐다. 왜 내 자리가 없었는지. 자리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엔 상상하던 바로 그 롤라가 있었으니까.

 

 

 

 

롤라의 첫 넘버인 Land of Lola 를 보고 듣는 내내 짜릿함에 몸서리를 쳤다. 두툼하고 단단하며 균형 잡힌 상체의 근육이 도드라지는 빨간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상상을 걷어차버리는 발성과 음색으로 박자를 변주하며 넘버를 가지고 놀며 무대를 휘어잡는 은롤라라니. 이대로 이 넘버가 두 시간 내내 계속되길 바랄 정도로 극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평소보다 비음을 살짝 더한 대화톤이 담백하게 귀엽고 깔끔하게 푼수 가득하며 극렬하게 사랑스러웠다. 찰리가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가 사용한 단어를 따라 하고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는 등, 쉼 없이 깨알 같은 디테일을 더하며 잔망스러움을 극대화했다. 부츠를 만들어주겠다고 찾아온 찰리와의 대화에서, 너처럼 "특별한" 이라는 형용사에 눈을 반짝인다거나 여장남자라는 말실수에 "뒤질래?" 하고 짜증을 낸다거나 "밀라노" 라는 단어에 또 배시시 미소가 퍼져나가는 얼굴 같은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완벽한 롤라를 구축했다. 이토록 발랄하고 귀여운 롤라라니!

 

 

당연히 Sex is in the Heel 도 완벽했다. 지난 킹키 관극에서는 엔젤들 역시 하나하나 꼼꼼하게 봤는데, 이날은 은롤라 밖에 안보였다. 넘버 도입부가 지나치게 섹시하고 황홀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심장을 부여잡았고, 팔랑대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발걸음이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넘버가 끝나고 부츠를 디자인해달라는 찰리와 실랑이하는 장면의 잔망스러움도 엄청났다. 무대 끝에 서서 도망칠 수 있었다며 발을 콩 구르며 구시렁대는 것도 귀여웠지만, 찰리의 제안에 난감해하면서 페도라 챙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미친 디테일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스포있음

 

 

은롤라 찬양만 잔뜩 했지만 석훈찰리도 너무 좋았다. 담백하게 처절한 감정이, 시즌을 뛰어넘은 자셋 관극만에 처음으로 찰리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만났던 찰리들은 꿈이 없어서 의욕이 없고, 책임지고 싶지 않기에 소극적으로 군다는 인상이 강했다. 반면 석훈찰리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소심한 노선이었다. 솔로 넘버의 가사처럼,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이유도 계기도 없기에 고스란히 무채색으로 머물러있는 찰리였다. 그래서 롤라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색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찾아가며 주체성을 보이기 시작하는 변화가 더욱 마땅하게 느껴졌다. 조급함에 주변 사람들을 챙기지 않고 혼자 앞서 나가버린 것도, 사회의 위선을 고스란히 제 입에 담아 처음으로 친구를 상처 입힌 것도, 그럴만한 폭발이라 이해됐다. 물론 용서하기 힘든 폭언이었지만, 하해와 같은 드넓은 마음의 롤라는 용서했으니까.

 

 

석훈찰리의 이 노선이 은롤라와 함께이기에 더 확실하고 확연한 생명력을 얻었다. 보통 롤라들은 독보적이고 화려하게 빛나며 주변 모든 것을 자신의 아우라로 압살해버렸다. 하지만 은롤라는 그 화려함이 묘하게 친근하고 편안했다. 이전에 만났던 롤라들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의 태양이라면, 은론라는 찬란한 황금빛의 노을 같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빛. 잔잔하지만 황홀하게 빛을 발하는 은롤라와 다양한 색을 스스로 물들여보기 시작한 석훈찰리의 근간에 다정함이 있기에, 이 페어가 유난히도 따뜻하고 포근했다.

 

 

필연적으로 부모를 넘어서야 하는 자식의 운명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닮았다.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존경하지만 부담스러운 존재, 아버지. 인정 받고 싶어서 머무르려 하고, 안락하기에 쉽사리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부모의 품. 그렇지만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깊고 묵직한 그 그림자. 아버지의 그림자를 대하는 애틋하지만 모순적이며 복잡다단한 감정이 닮았고, 각기 다른 형태로 벗어나고 성장하는 색감의 결이 유사하다. 처음으로 롤라와 찰리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며 포개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달라진 주요 앙상블들의 목소리가 새로움을 더했고, 삼연에 비해 조금 달라진 듯한 편곡이 신선함을 부여했다. 은롤라와 석훈찰리 페어를 꼭 한 번은 더 보고 싶은데, 마지막 티켓팅과 취켓팅과 예대를 모조리 망해버려서 너무 속상하다. 플미, 대리티켓팅, 매크로 등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극을 정말로 사랑하는 관객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게 몹시 속상하고 노엽다. 꾸준히 예매창을 들락거릴 예정이니 부디 자둘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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