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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in 광림bbch홀, 2020.09.16 3시

 

 

 

 

카이 베르테르, 김예원 롯데, 이상현 알베르트, 김현숙 오르카, 송유택 카인즈, 이하 원캐.

 

 

지난달 알앤디 첫콘을 관극할 떄만 해도 세상이 이토록 괴로워질 줄 알지 못했고, 한 달만에야 가까스로 치킨홀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힘겨운 현실 너머 무대 위의 발하임이 잔인할만큼 지나치게 눈부셔서, 1막 내내 펑펑 눈물을 쏟았다. 따뜻한 색감의 조명과 풍성하고 아름다운 선율의 오케스트라, 동화처럼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무대가 마음을 벅차게 했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대극장 특유의 풍만함과 비현실적으로 다정한 이야기가, 띄어앉기와 마스크로 쓸쓸해보이는 객석 전체를 아우르며 위로를 건넸다. 공연을 사랑하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통감했다.

 

 

 

 

나무 질감을 지닌 액자 형태의 무대 틀, 해바라기를 비롯한 온갖 색감의 꽃들, 지친 삶에서 소소한 행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소, 영혼의 끌림을 거부하지 못하고 온마음을 내던지는 순수함까지. 꽃과 나무가 환하게 감싸안는 따뜻한 5월의 발하임이 생생하게 피어난다. 2차원의 책 속에 담긴 이야기가 3차원의 무대 위에 구현되며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끌어낸다. 이렇게까지 아기자기한 동화같은 대극장 공연은 처음이기에 더욱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상징과 비유를 담아내서 곱씹을수록 재미있는 극이다. 1막 초반 인형극의 자석섬 이야기는 극을 관통하는 베르테르의 행보를 은유하며 결말까지 암시한다. 베르테르는 사랑이라는 열망에 사로잡혀 극단적으로 치닫고, 롯데 역시 고요한 밀물처럼 차오르던 감정으로 인한 예상치 못한 허망함에 휩싸인다. 자석섬을 굳건히 보호하는 바다처럼, 알베르트는 자석섬에 이끌리는 배를 응시한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을 때는 고요히 예의를 지키며, 지나치게 선을 넘었을 떄는 거세게 몰아치며.

 

 

2막 상현알베르트의 강약조절이 중간중간 오싹할만큼 짜릿했다. 법 집행자의 단호함과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 우아함과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줄 아는 배려심이 아우러진 모습이 고결한 인간의 표상을 그려냈다. 절망을 담아내는 카벨텔의 노래는 때로 섬세하고 때로 강렬하게 이야기를 사로잡았다. 이 극의 넘버들을 부드럽고 황홀하게 풀어내는 목소리가 몹시 기껍고 감사했다.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예원롯데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는데, 특유의 맑고 선명하며 다정한 연기가 롯데를 한층 다채롭고 생생하게 만들었다. 1막 후반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사이에 서서 그 찰나의 미묘한 공기를 느낀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던 예롯데의 눈빛이, 2막의 감정에 온전한 개연성을 부여했다.

 

 

 

 

20년이나 된 창작뮤지컬을 이제서야 마주했지만, 마땅한 시기의 만남이라는 생각을 했다. 2막 첫 넘버의 가사나 갈등 장면에서의 발하임 사람들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의 연출 의도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등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극 하나로 칠흑같던 세상에 샛노란 잉크가 번져나갔다. 시대가 힘겨울수록 예술이 더욱 필요하다. 상처를 보듬고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겐 위로와 용기와 눈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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