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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

in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2019.04.19 8시

 

 

 

최나라 함익, 오종혁 연우, 이지연 분신 익.

 

 

※스포있음※

 

 

거울 앞에서 그 너머의 분신익을 마주하는 함익은, 매번 맨발이다. 자신을 숨기고 냉랭하고 냉정한 말들을 내뱉던 그는, 분신의 앞에서야 자유롭다. 분신익은 함익이 마주했던 타인의 말들을 반복해주고, 그는 가면을 쓴 채 삼켜왔던 본심을 쏟아내며 카타르시스를 만끽한다. 위선적인 사람들, 대항할 수 없는 가족들, 자꾸 스스로를 투영하게 만드는 연우, 비극을 모르면서 '감히' <햄릿>을 다루는 학생들. 본래의 모습을 감추며 함익은 계속 내면으로 침잠하고, 분신익의 앞에서야 솔직하게 제 모든 것을 털어낼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인듯 완벽하게 맞물리는 타이밍으로 대화하듯 말을 주고 받고, 독백하듯 상대의 말을 반복한다. 분신익은 곧 함익이고 함익은 분신익 앞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비극을 모르는 자들이라 단정하고 비하했던 학생들의 날선 저항, 더 나아가 연우의 반발은, 함익에게 충격과 절망을 건넨다. 동시에 꾹 눌러온 그의 분노와 아득함이 일순 폭발해버릴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아빠에 의해, 새엄마에 의해, 자살 당했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고독한 자기자신을 햄릿에 반영하던 함익은, 알을 깨뜨린다. 모든 상황적 요인에 따라 함익의 복수 대상 그 자체를 상징하는 원숭이 햄릿을 제 손으로 죽이고야 만다. 오필리어와 결혼하고 안전하고 평안하게 왕위를 물려받는 선택 대신, 자신마저 파괴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참지 않고 맞부딪히는 선택을 한 햄릿처럼. 함익은 침묵하고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운명에 반발한다.

 

 

 

 

원숭이 햄릿을 죽여버린 함익은 검은 구두를 그대로 신은 채 무대 맨 앞으로 걸어나와 분신익과 나란히 선다. 분리된 채 말을 주고 받던 두 사람은, 햄릿의 가장 유명한 대사를 읊는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고 분신익은 침묵한다. 함익은 혼자,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 대사를 반복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제야 함익은 분신익을 바라본다. 그리고 구두에서 내려온다. 맨발의 함익은 미소를 지으며 분신익과 손을 맞잡는다. 그대로 뒤로 돈 두 사람은, 비로소 하나가 된 함익과 분신익은,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을 크고 분명하게 떼며 무대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위선자들, 학생들, 가족들, 연우. 박제된 인형처럼 서있던 그들은, 함익이 지나가는 순간 태엽이 풀린 것처럼 세박자에 맞춰 목과 상반신과 하반신을 축 늘어뜨리고 종국에는 바닥에 쓰러진 채 무대 상하수로 굴러 퇴장한다. 스모그에 온전히 가려질 때까지, 함익의 걸음걸이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남은 건 핀조명을 받는 구두 한 켤레.

 

 

 

 

묻는다. 햄릿으로 태어나서 줄리엣으로 죽을 것인가. 그대는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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