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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엘리어트

in 디큐브아트센터, 2018.05.04 8시 공연





성지환 빌리, 한우종 마이클, 석주현 데비, 김갑수 아빠, 최정원 윌킨스, 홍윤희 할머니, 안유준 스몰보이. 지환빌리 세미막. 빌리 자첫자막.



근래 관극을 하면서 가장 갈망하던 '좋은 연출' 을, 이토록 오랜만에 마주하니 벅찬 행복을 감출 길이 없었다. 장소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무대 구조 및 소품 활용, 다른 공간을 겹쳐 보이게 만드는 배우들의 동선, 여러 무대 장치의 적절한 사용, 담백하면서도 절정의 순간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조명, 장면에 들어맞는 음악. 매 장면마다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는 연출을 보며, 좋은 극이 응당 지녀야 할 좋은 연출을 찾아보기 힘든 근래 대극장 공연들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빡침이 들었다. 이 극이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에 마음을 사로잡는 연출이기에, 고전으로써 긴 시간 동안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왜 대부분의 라이센스 극들은 한국 프로덕션의 손을 거치면 늘 불만족스러워지고, 왜 최근 '쏟아져 나오는' 대극장 및 중소극장의 한국 창작 뮤지컬들은 늘 촌스럽고 뻔하고 감흥이 없는 것인가. 공연을 볼 때 연출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인식하려 노력하는 관객이자 뮤덕이기에, 기대와 실망을 수없이 반복하던 지난 관극 경험들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깊은 현타를 느꼈다. 음악, 음향, 무대, 안무, 조명, 의상, 소품, 분장, 기술 등등 이러한 각 분야의 연출을 총괄하여 하나의 온전한 극으로 탄생시키는 능력을 지닌 총연출 혹은 프로듀서의 부재를 깊이 통감한다. 회의감과 속상함과 아쉬움에 절망스런 기분이 들면서도, 또 이렇게 훌륭한 공연 하나의 기억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는 덕후라서 스스로가 애잔하기까지 하다. 



1막. 담배를 문 남자 앙상블들이 빌리의 할머니와 춤을 추고선 무대 퇴장 직전까지 매끄럽고 정돈된 동작으로 움직이는 Grandma's song. 발레걸들의 수업과 파업 노동자들 및 경찰들의 대립이 완벽한 동선과 합을 이루며 같은 공간에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내는 Solidarity. 생전 처음 마주하는 발레에 갈피를 잡지 못하며 휘청대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되는 빌리의 모습이 유려하게 스며들어 있고, 일렬로 선 어른들 뒤에서 노동자에게는 경찰모를, 경찰에게는 노동자의 모자를 씌워주는 아이들을 보여주며 혼란과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잔망 넘치는 마이클과 사랑스러운 빌리, 그리고 거대한 의상들이 보여주는 Expressing Yourself. 아름답고 애틋한 엄마의 편지 The Letter. 극도의 절망과 좌절, 그로 인해 터져 나오는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뿜어내는 작은 아이의 몸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Angry Dance. 2막. 유쾌하지만 풍자와 비아냥과 저주의 끝을 달리는 Merry Christmas Maggie Thatcher. 홀로 남은 빌리가 어른 빌리와 함께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에 맞춰 발레를 추는 Dream Ballet. 와이어에 매달려 빙글빙글 돌며 무대 저 위까지 솟아오른 빌리의 모습을 보며, 바로 그 순간이 빌리 엘리어트를 연기하는 저 어린 배우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눈부시며 가장 짜릿한 찰나임을 느꼈다. 어두운 무대에서 제일 밝은 조명을 받으며 오롯이 존재하는 저 순간이 얼마나 벅차고 아름다우며 놀라울지, 그저 상상만 해볼 따름이다. 춤을 출 때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터져나오는 환희와 기쁨, 열정과 행복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빌리의 Electricity. 땅 아래로 내려가는 광부들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담은 어두침침한 실루엣, 먼지로 인해 번짐이 심하지만 꼿꼿하게 직선을 그려내는 그들 머리 위 헬멧 조명, 강인하게 삶을 살아내리란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Once We Were Kings. 과거를 마무리짓는 The Letter Reprise. 그리고 Finale. 이 모든 장면들의 연출 덕분에, 그 순간 무대 위 모든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온전히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이 극은, 빌리 엘리어트 두 번째 관극이다. 라이센스가 자첫자막인 거고, 7년 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관극한 경험이 있다. 너무도 까마득한 옛날이어서 정확하고 디테일한 기억은 전부 휘발되었으나, 무대를 가득 채우는 눈부신 아이의 존재감 만큼은 선명히 기억한다. 그 이후에 본 위키드나 위윌락유와 비교했을 때, 영국 북부의 작은 광산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 극의 재미는 분명 덜했다. 사투리 개념의, 다소 발음이 세고 억양이 다른 영어가 쉽지 않았던 점도 있고, 역사책으로만 알고 있는 마가릿 대처 시절 광부 파업이라는 시대상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점도 있다. 그래서 라센극에서는 어떻게 이 지점을 괴리감 없이 다루었을지 걱정도 기대도 됐다. 배경을 다루는 극 초반은 설명이 많고 무엇보다 떼창 가사가 너무 안 들려서 좀 힘들었다. 파업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 굳게 믿고 개인의 희생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며 막막한 현실에 아등바등 저항하는 빌리의 형이 쏟아내는 비아냥과 분노도 그저 화만 가득하여 듣기 힘들었다. 마가릿 대처를 비꼬고 풍자하고 비하하는 여러 말장난들도 번역 자체는 괜찮은 거 같은데 귀에 꽂히지가 않아서 당대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 요소를 전반적으로 아주 쉽게 다듬었다는 건 확실했다. 시대상을 회피하거나 숨기지 않고 적절한 수위로 드러냈기에, 어둡고 절망적인 어른들의 상황과 비교하여 욕설과 비속어를 듣고 배워 입에 달고 살면서도 천진하고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아이들의 순수한 면면들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 진흙 속의 진주처럼 찬란히 빛나는 제 빛을 숨김 없이 드러낸 빌리의 천재성이 더욱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물론 한계는 여전히 있다. 80년대 영국 광부촌을 배경으로 한 이 극이, 언제까지 효력이 있을 것인가. 킹키부츠를 보면서도 느꼈던 공간적, 시대적 배경의 한계를 고민하게 된다. 이야기가 전달하는 가치와 주제는 결코 색이 바래지 않겠지만, 그 이야기가 존재하는 배경은 갈수록 현실과 멀어지고 있다. 라센극 삼연이 올라오려면 또 한참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텐데, 그 때는 또 어떻게 이 괴리를 막아낼 것인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작년에 헤드윅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던 헤드윅. 역사의 정확한 지점이 있기에 해가 지날수록 헤드윅이 서있는 시간과 공간이 멀고 아득해진다. 극의 시점을 바꾸거나, 배경에 변화를 주거나, 구성이나 연출을 아예 다르게 하는 등의 보완책을 통해 좋은 극들은 제 가치를 증명하며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리라 믿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뼈아프게 체감하게 한 고민이었기에 무척 아프고 고통스럽더라. 훌륭한 예술은 세월이 지날 수록 깊고 농밀해지기에 '고전' 이라 불린다. 다만 공연이라는 장르는 책처럼 글로써 존재하거나, 그림처럼 종이 위에 남아있거나, 음악처럼 음표로써 존재하거나, 영화처럼 시대와 기술의 한계가 감안되는 영상으로써 남아있는 2차원의 예술이 아니다. 극이 무대 위에 올라오는 바로 그 시점에 어떻게 관객과 교류하고 공감하고 공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예술이고, 그렇기에 낡고 오래된 소재를 다룸에 있어 타 장르보다 더 치열하고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 이 땅에서 공연을 만들고 있는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러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





빌리를 보며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통감했다. 그리고 아이는 성장하기 위해 미련 없이 과거를 추억으로 묻어 두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의지를 지닌 강인한 존재임을 인정했다. 부모이기에, 꿈을 가진 아들을 위해 인생의 신념까지 등질 수 있는 의지를 보인 아버지.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너는 꼭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힘 닿는 데까지 빌리를 위해 노력하고선, 그리울 거라는 그의 말에 그렇지 않을 거라며 더 넓은 미래를 향해 등을 떠미는 윌킨스 선생님. 자신을 버티게 해 준 편지에 답장을 쓰며 제 유년기에 작별을 고하는 빌리를 따뜻하게 응원하는 엄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를 위하여 희생하고 지원을 건넨 어른들은, "선생님도 행운을 빌어요." 라는 말 한 마디에 그 희생의 몇 곱절이나 되는 감동과 감사와 의지와 용기를 되돌려 받는다. 모든 아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놀랍고 유의미하다. 그렇기에 어른은 잘 이끌어 줄 의무가 있다. 이 당연한 생각을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시게 그려낸 이 극에, 찬사와 감사를 동시에 보낸다. 특히 이 극을 완전하게 만들어준 아역 배우들 모두가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마지막 공연까지 모두들 지금처럼 무사히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란다. 다들 이 무대 위에 올라와줘서 무척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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