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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Musical

벤허 (2017.09.19 8시)

누비` 2017. 9. 20. 15:35

벤허

in 충무아트홀 대극장, 2017.09.19 8시 공연



 

 

박은태 유다 벤허, 박민성 메셀라, 안시하 에스더, 이희정 퀸터스, 이지훈 어린 티토, 이하 원캐. 서지영 미리암, 김성기 시모니테스, 이정수 빌라도, 선한국 티토, 곽나윤 티르자. 은벤허, 성셀라, 시하에스더. 은성안. 은성페어 세미세미막. 벤허 초연 자첫.

 

 

왜 사람들은 좋은 가문 출신의 멀쩡한 사람이 바닥 끝까지 무너져내려 고난과 고초를 겪은 뒤 실력과 운을 통해 재기하여 복수하고 종국에는 용서하는, 이런 류의 영웅담에 여전히 매혹당하고 열광하는 걸까. 요즘 시대에 굳이 이천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19세기 소설 원작이자 20세기의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었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공연을 보고 온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래서 이 극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 건가? 민족에, 해방에, 신념에, 메시아에, 벤허에, 자유에, 뭐 어쩌라고. 몬테크리스토처럼 아예 오락성에 몰빵한 것도 아니고, 지저스크라이스트수퍼스타처럼 인간 개인의 감정과 생각과 갈등에 초점을 둔 것도 아니며, 프랑켄슈타인처럼 신과 운명에 도전하다 무너지는 절망에 중점을 둔 것도 아니다. 가혹한 운명으로 고통받고 굳건히 일어나는 인생 속에 예수의 고행과 희생을 끼얹고는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다분히 영웅적인 개인을 다루는 이 극에서, 대체 뭘 보고 느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양한 주제를 던지고는 싶어하는데,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폐부를 찌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과 의문에도 불구하고, 무대 디자인 및 연출과 은벤허의 골고다 장면으로 인해 벅찬 행복에 젖어 공연장을 나설 수 있었다. 자둘 하면 더 세게 치일 것 같아서 10월 쯤에 다시 볼까 생각 중이긴 한데 계속 예매창을 들락거리며 은벤허 회차 앞자리를 애타게 찾고 있다. 2층 객석에서 전반적인 무대 구조물이나 무대 전환,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나 빔프로젝트를 사용하는 등의 뒷배경 활용, 그리고 앙상블의 군무를 포함한 대극장 특유의 웅장함은 생생히 느낄 수 있었지만, 쩌렁쩌렁한 음향을 온몸으로 느끼며 은벤허 표정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1층에서의 재관극이 간절하다. 뮤지컬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걱정했던 '의식의 퇴보'는 잘 숨겼고, 왕용범 연출 특유의, 너무 뻔해서 묘하게 촌스럽던 극적 요소들 또한 기대 이상으로 유려하고 적당했다. 크게 지루하지 않고, 신파나 러브스토리에 치중하지 않았으며, 적당히 쇼뮤 다운 장면들이 흥을 돋구고 집중을 유도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전혀 접한 바 없지만 꽤 방대하다고 알고 있는 원작을 잘 쳐내고 다듬어서 대극장 뮤지컬 치고는 개연성의 부재가 '상대적으로' 덜 느껴졌다. 물론 완성도가 빼어나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지만ㅋ 부연을 넣을 수 있는데도 너무 과감하게 생략되어 설명이 불친절한 부분들이 다소 있었다. 1막에서는 뮤지컬 맞나 싶을 정도로 넘버 없이 대사 위주로 진행하다가 2막 후반에서 급물살을 타는 전개를 오로지 캐릭터 감정선이 폭발하는 넘버만으로 설명을 끝내 버린다. 종합해봤을 때 대극장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큰 부담 없이 추천 가능한 극, 이라고 총평하고 싶다.

 


 


할 말이 이것저것 많지만, 무대연출이랑 골고다 씬만 정리하려 한다. 간만에 매 장면이 만족스러운 무대 연출을 보고 와서 행복했다. 한정된 크기의 공간 속에서 최대한 영리하게 칸막이를 내렸다 올렸다하고 각기 다른 구조물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조합하여 여러 개의 장소들을 만들어낸다. 자세히 보면 이건 저 벽이고 요건 아까 나왔던 걸 다르게 놓았다는 것 정도를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직관적으로 무대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장소들이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인지될 수 있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이렇게 대극장 매력을 양껏 뽐내는 무대연출을 근래 들어 만나기 힘들어서 아쉬웠는데, 이 극이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해줬다. 심지어 무대디자인 하신 분까지 찾아봤다ㅋㅋ 센스 있게 공간을 활용한 무대연출은 아이다에서 만났었고, 화려하고 유려한 무대연출은 초연 마타하리나 엘리자벳이 떠오른다. 빔프로젝터를 사용한 스크린 연출은 도리안그레이에서 시도됐었는데 그 극보다 벤허가 훨씬 퀄리티가 높다. 인간의 시야각을 이해하고, 시각적 자극을 어떠한 구조와 방식으로 인지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분석을 기반으로 하여, 더 입체적이고 더 확실하게 휘몰아치듯 무대를 압도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배가 나오는 장면이나 바닷속, 전차씬 등등이 훌륭했다. 콜로세움처럼 생긴 전차경기장 혹은 검투장의 양쪽 벽을 움직이는 연출도 극적 긴장감을 높이고 무대 전환 또한 드라마틱하게 완성해내서 아주 좋았다. 부디 무대디자인팀에게 따로 기립박수를 보내는 시간 좀 주세요.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는 전차 장면도 최고였다. 가까이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눈에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뒷배경과 어우러지는 그 강렬한 임팩트의 소품들이 정말 아름답고 훌륭했다. 단 2분을 위해 몇 억을 투자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어휴 감사합니다. 엄청 좋았어요.

 


※스포있음※


 

얘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골고다. 메시아 언급이 드문드문 나와서 이 정도의 짘슈 지뢰면 뭐 괜찮네, 하고 보고 있다가 2막에서 은벤허가 갑자기 "그 분을 만나봐야겠어!" 하는 말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뭐라고요? 만나... 누굴 만나러간다고????? 가벼운 패닉상태에 빠졌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가 등장하자마자 눈물이 터지고 이가 덜덜 떨려왔다ㅠㅠㅠ 한가운데 커다랗게 원형으로 무대가 회전을 하고 있고 십자가 주위로 군중들이 두 겹으로 에워싸고 있는데 그들 사이를 온 몸으로 헤치며 뚫고 들어간 은벤허가 예수 앞에 선다. 이 장면이 짘슈를 완벽히 연상시키는 트리거여서, 이 극을 두 번은 못보겠다는 탄식을 한숨에 섞어 토하듯 내뱉었다. 예수를 붙들고 절규하는 은벤허의 모습에 15년도의 유다들이 겹쳐보이며 넋이 탈출하고 있었는데, 그 십자가를, 직접, 지는, 은벤허의, 은저스의 잔상이 보이는 바로 그, 그 장면에, 일순 숨이 멎었다. 이 찰나의 감정은 정말, JCS의 츄종자들이어야만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 터다. 종교 없고 신도 안 믿지만, JCS의 지저스와 유다는 아주 특별하고 유의미하기에, 골고다 장면 통째가 강렬하고 가슴 아프고 그립고 고통스러웠다ㅠㅠ 여기 연출도 완벽할 정도로 좋아서 더 극렬하게 감정을 건드린 것도 있다. 그렇게 예수가 은벤허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고, 십자가와 군중들은 다시 길을 재촉한다. 무대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은벤허. 메시아가 속삭인 말. "저들을 용서하라 /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 / 그런 저들을 용서하라" ..... 은저스 지뢰를 밟고 장렬하게 산화한 관객이 여기 한 사람 있습니다!!! 내면의 목소리가 타인에게 들리기라도 했다면, 내가 속에서 내지른 비명이 은벤허의 절규를 집어삼켰을 것이다ㅠㅠㅠㅠㅠ 짘슈 돌아와ㅠㅠㅠㅠ 은저스 마저스 다 돌아와ㅠㅠㅠㅠㅠㅠㅠ 이 장면 때문에, 유벤허 카벤허는 오히려 못보겠다. 자신의 고통은 무엇이었냐며 울분과 고통을 쏟아내는 인간적인 은벤허를, 그 가슴을 저미는 원망과 먹먹함을, 차마 다른 배우를 통해 목격하고 공감할 수 없다ㅠㅠ

 

 

1막 피날레이자 2막 피날레인 운명 넘버를 부르는 은벤허의 노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박은태 배우는 입덕 이후 필모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배우들 중 한 명인데, 확실히 연기의 깊이와 농도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도리안 은헨리를 통해 배우의 발전과 성숙이 무엇인가를 목격했고, 팬텀의 은에릭을 통해 '뮤지컬 배우'로서의 완성형이 어떠한 형태이리라 가늠해봤고, 매다리의 은버트를 통해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선의 깊이와 폭이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는가 고민했다. 그리고 은벤허는, 이 배우를 통해 만나봤던 모든 역할들을 통틀어 최고의 표현력과 감정선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어쩜 이렇게 다양한 극을 하면 할수록 좋아지는지, 관객으로서는 그저 놀랍고 고마울 뿐이다. 필모 따라다닐 의지가 생기는 배우다, 정말. 아직 차기작 안나온 거 같은데 연말에 쉬시나. 요새 애정하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열일해서 너무 힘들지만 동시에 행복하다. 토욜 밤공을 꼭 볼 수 있길 바라며 은벤허 앓이를 해야겠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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