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쓰릴미

in 백암아트홀, 2017.05.16 8시 공연

 

 

김재범 나, 정상윤 그, 이범재 피아노. 범넷, 토촤, 범피. 범토로. 10주년 쓸 자첫자막.

 

이날 공연 하나에 제대로 행복하려고, 이번 시즌 쓸과 그토록 스케쥴이 안 맞았나보다. 공연이 너무 좋아서 95분 동안 오롯이 몰입했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실실거리며 공연을 복기했다. 비슷한 기분을 작년 마돈크를 보고 나서도 경험했었는데, 김재범 배우 특유의 목소리와 연기노선, 비쥬얼 등이 나랑 잘 맞아서 관극 후의 충만함이 엄청나다. 같은 극으로 여러 번 만나는 대신 다양한 작품으로 만나고 있는데, 본인만의 일관성 있는 연기를 근간으로 하되 각 캐릭터들이 서로 겹쳐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매번 놀랍다. 마돈크 범백 때도 그랬지만, 중저음 파트 부분 음색이 엄청 취향이고. 범백의 풀정장과 스모키 화장에서 제대로 치였었는데, 범넷 또한 중간 심의관 씬에서 상의 자켓 벗고 넥타이 풀어버린 채 안에 상아색? 조끼 입고 고개 살짝 옆으로 떨군 채 시선 내리깔고 서있는 몸선에 심쿵했다. 소년미에 허덕이는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장면은 사진으로 박제하고 싶었다. 으으... 물론 정상윤 배우도 좋았다. 노래 엄청 시원시원하고, 이날 노선이 범넷이랑 잘 어울려서 엄청 흥미진진하게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리가 노단차인 D열 왼블 사이드 쪽이라서 공연 내내 왼쪽 목이랑 어깨가 결려 죽을 뻔했다ㅠㅠ

 


※스포있음※

 

들어오는 순간, 순정넷임을 확신하고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지쳐서 힘없는, 초탈하고 덧없는 듯한 얼굴. 머금고 있던 한숨이 쏟아지는 소리 속에 섞이는 물음, "앉을까요". 움츠러든 어깨와 낮은 목소리 어둡고 텅 비어있는 표정으로 34년 후의 네이슨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과거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는 범넷. 초조하게 한 번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며 다시 돌아앉았다가 또 돌아보고 여전히 오지 않는 모습에 긴장과 허탈함 섞인 웃음을 얼굴에 머금는다. 이렇게 기다리느니 새나 관찰하겠다는 듯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끌고 안경을 꺼내 쓴다. 안경 쓴 장면에서 의식적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는 모션을 여러 차례 하는데, 자연스럽게 그 소품에 신경을 쓰게 만들어 복선을 남기는 것 같아서 좋았다. 느릿하게 새를 관찰하는 네이슨을 관찰하며 다가오는 토촤. 이날 극 내내 느꼈지만, 토로촤는 범넷을 사랑,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긴 했지만. 토촤는 자신이 만져주지 않아서 안달복달 못하는 범촤를 보는 걸 즐겼다. 여지를 주면서도 결정적인 타이밍에 놀리듯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쏙 빠져나가는 토촤와, 그런 그 모습에 매번 실망하는 자신을 알면서도 애태울 수 밖에 없는 범넷. 관계의 우위에 집착한다기 보다는, 살짝 당겼다가 확 밀어내고 또다시 장난스럽게 당기를 반복하는 치기 어리고 겉멋 든 연애 그 자체였다. 쓰릴미에서 안아달라, 만져달라, 구걸하듯 애원하는 범넷을 바라보는 토촤의 눈빛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겠어^_ㅠ 범넷 입장에서야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그래도 스킨십이 많은 리차드이기도 했다. 턱 만지는 손끝도 혐오나 경멸은 전혀 없고 그저 섬세하고 애정어린 느낌이었다. 보통 리차드들이 '애인' 이라는 호칭 등에 진저리를 내며 혐오하기 때문에 토촤의 이 노선이 신선하고 좋았다. 쓰릴미 넘버 중간에 토촤가 "역겨워!" 라고 내뱉자 범넷이 멈칫하고는 상처입은 눈빛으로 "내가 역겨워?" 하는데, 그 순간 토촤 표정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 단어를 내뱉고 나서 후회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자기야, 라고 수차례 불러주는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졌고.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질 수밖에 없는 연애라는 관계 속에서 넷이 촤를 훨씬 더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범넷이 더 많이 고통 받고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다정한 개새끼(..) 노선이라 불리던데, 이렇게 밀당을 해주니까 너드미는 있지만 멀쩡하고 똑똑한 네이슨이 정신을 못차리고 리차드에게 완전히 빠질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 생겼다. 

 

 

토촤가 미친놈만 아니었더라면, 더 큰 자극을 갈구하며 자신의 망상 속 '초인'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그냥저냥 잘 살았을 두 사람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토촤는 걱정으로 휩싸인 채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며 휘둘리는 범넷을 보며 점차 자기도취에 중독된다. 적당히 범넷을 받아주던 그가 버럭 화를 내거나 넷을 더욱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비교적 동등한 위치였던 관계성이 점차 균형을 잃고 리차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행위인 '살인'에 대한 논의와 실제로 행한 시점을 기준으로, 귀엽기까지 했던 맹목적이고 순정 넘치던 범넷의 사랑 겉에 얇은 껍데기가 생긴다. 범넷은 일부러 안경을 떨어뜨리고 와서, 수 차례 토촤에게 기회를 준다.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안경 이야기를 꺼내며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토촤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두하며 화를 내고 불안해하기 시작하며, 결국에는 "우리? 아니, 너." 라는 말을 내뱉고야 만다. 그 순간 범넷의 표정.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잔잔하던 범넷의 주변에서 순간적으로 노여움의 섬광이 빛났다 사라진다. "뭐?" 하고 무의식적으로 되묻는 그 목소리와 표정에 허탈감과 배신감, 그리고 옅은 결심이 어린다. 경찰서에 다녀온 뒤 자신을 내치는 토촤의 행동을, 예상했음에도 재차 상처 입는 범넷. 자신의 배신으로 체포된 토촤와의 재회 장면에서, 범넷의 그 변화가 절정에 달한다. 시발 내가 널 왜 사랑해서!! 라고 절규하듯 절망하듯, 탄식하며 좌절하는 범넷. 그럼에도 그의 행동들로 인해 서서히 관계의 우위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말을 지어내서 넷에게 전부 뒤집어 씌우겠다는 촤의 말에 결국 폭발하는 범넷. 두 사람이 강강으로 부딪히는 이 장면 짜릿하게 좋았다. 결국 토촤가 굽히고 들어간다. 무릎도 꿇어보고 범넷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스킨십도 하려 하지만, 범넷은 단호하고 냉정하게 그 손길을 밀어내고 뿌리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일 수밖에 없기에, 토촤가 포기한듯 뒤를 돌아버리자 무조건반사 마냥 그의 손목을 꽉 붙든다. 그런 제 자신이 싫다는 듯 한숨과 눈물을 섞은 범넷의 표정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는 토촤의 표정이, 촤가 우위에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분명 쓰릴미 마지막 부분에서 범넷이 목에 얼굴 파묻자 객석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씩 웃는 토촤의 미소는 자신만만했다. 범넷을 두고 들어갈 때도 여러 번 그 미소를 보였었다. 계약서 작성을 종용하는 부분에서 후반부 넘버의 폭발 또한 강렬했다. 그 와중에 토촤가 불러주는 계약서 내용 중 "항상 함께 하며" 라는 부분에서 좋다고 헤, 하고 실실거리는 범넷이 비교가 되었고. 그런 그를 한심해하면서도 귀여워하던 토촤였는데, 안경을 발견했다는 신문기사 내용에 범넷과의 선을 긋는 것을 기점으로 그에게서 정을 슬쩍 뗀다. 본인의 그 행동이 범넷에게는 각성의 도화선이 된 것도 모르는 채, 범넷을 만나 "내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 는 말이나 하는 토촤. 그 말에 헛웃음 치며 "너 대단하다," 라고 말하는 범넷. 그 말이 비아냥임을 잘 알 면서도, 역시 넌 날 잘 알지, 하는 듯한, 일견 뿌듯해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을 짓는 토촤의 표정. 그래도 같이 있어달라 붙드는 범넷을 다정하게 받아줄 듯 만져주다가 내팽개치듯 놓아버리고 떠난다. 그리고 경찰서에 다녀온 뒤 돌변하여 못된 말만 쏟아내는 토촤와 그에게 떠밀리고 무너지는 범넷의 갈등은 정점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강한 충격에 바닥으로 쓰러진 범넷의 모습에 토촤는 흠칫 하듯 쳐다보다가 그러게 왜 내 말을 안들어서, 하고 생각하듯 한숨쉬며 다가가 경멸의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같이 경찰서에 갇히고 나서도, 여전히 자신이 넷 위에 있다는 자신감에 빠져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토촤는 결국 판결일 전날밤을 맞이한다. "자? 자니? 자는거지?" 하고 확인하고는 겁에 잔뜩 질린 채 절규하듯 쏟아내는 토촤의 넘버가 엄청 좋긴 했는데, 당연히 동정은 1g도 들지 않았다. 극 내내 리차드를 보며 쟤는 대체 왜 저러고 사냐, 싶은 생각 뿐이었는데 그나마 이 넘버에서 한심하면서도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토촤가 범넷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는 쟤보다 우위에 있으니 얕잡아 보이긴 싫다는 자존심이 아니었다. 쟤가 내 애인이고 난 잘난 사람이네 이렇게 공포에 질려 무서워하는 꼴 보기 싫은 하찮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라는 감정선이 훨씬 강했다. 토촤 진심 범넷 사랑했다니깐..

 

일부러 안경을 떨어뜨린 거라는 범넷의 고백. 이겼다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말하면서도 순간순간 무너져내리는 범넷ㅠㅠㅠㅠ 토촤도 범넷도 얼굴이 눈물 범벅이었는데, 정말 범넷은 중간중간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은 위태함이 심각해보였다. 실시간으로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범넷의 그 눈빛. "내가 지금 널 협박하니?" 하는 목소리에 눈물이 담겨 먹먹하고 비음이 섞였다. 눈물을 보이지 말라며 손을 들어 토촤의 눈물을 닦아주는 범넷과, 그런 그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손도 들어올려 똑같이 눈물을 닦아주는 토촤 때문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결국 이 새끼한테 옭아매여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끔찍한 절망에 극혐하는 게 아니라! 눈물을 닦아 줬다고..ㅠㅠ 미친놈을 사랑한 죄로 더 미쳐버린 네이슨과, 그런 그를 사랑하기는 했던 미친놈 리차드라니. 이 페어의 이 노선, 정말 취향직격이다.

 

멍한 얼굴로 마지막 취조실 씬. "그가 샤워실에서 찔..."까지 얘기하고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던 범넷은 마음을 추스르고 "그가찔려죽은채발견됐을때" 라고 입에 담기도 싫다는 듯 빠르게 뱉어버린다. 가석방을 처리하게 된 이유가 검사 때문이라는 심의관들의 말에 멍하니 있다가 "검사요?" 하고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하는 표정에서 범넷이 굳이 이 감옥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보였다. 당신은 자유야, 라는 심의관의 말에 "자유," 라고 따라 발음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린다. 스스로 만들어내고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 '갇힌' '새장' 속에서 강제로 풀려난 '나'. 원하지도 않았고, 리차드도 없는 자유에 대한 허망함. 당신은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럼 당신 인생도 달라졌을 거예요, 하는 심의관의 말에 그 허망한 웃음을 흘리며 네, 그랬겠죠, 하고 답하는 범넷. 그 표정에서, 이미 그 가정을 상정해봤고 성공한 인생 또한 상상해보았으나, 그럼에도 그를 만나지 않은 그 인생보다는 이게 나았다는 결론까지 내버렸음이 너무나 자명하게 보여서 더욱 아팠다. 마지막 파쓸에서, 토촤의 마이크가 지지직 소음을 내다가 사망했지만, "자기야, 멍청하게 새나 보고," 하는 육성 대사가 너무나 다정했다. 그 최고의 환상에 환하게 웃던 범넷이 객석을 향해 뒤를 돌더니 북받치는 감정과 울컥하여 쏟아지는 눈물, 그래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는 말을 가까스로 붙들어 토해내듯 내뱉는다. "쓰릴미". 그 먹먹한 여운이 짙고 묵직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서 완벽한 공연이었노라 만족한 관극이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행복하다. 너무 완벽해서 굳이 또 보고 싶다는 욕망조차도 생기질 않는다. 이제 3년은 있어야 돌아온다던데, 그 기다림이 전혀 힘들지 않을 것 같다. 오슷도 사왔으니 넘버 들으면서 이날 공연을 마음 속에 더 선명하게 박제를 해봐야겠다.

 

공지사항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