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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디큐브 아트센터, 2015.09.01 8시 공연





딱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디큐브 아트센터. 익숙하게 재관람할인을 받고 티켓 수령을 한 뒤, 엠디부스로 올라가서 당일 발매된 따끈한 2차 프로그램북을 구매했다. 그러고보면 이번 시즌 라만차와는 소소하게 타이밍이 잘 맞는 느낌이다. 노란색 비닐봉투에 담긴 샛노란 프로그램북. 안에 담긴 사진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세류반테스, 지나치게 잘생긴 거 아닙니까?ㅠㅠ 파스쿠치에 앉아 휘리릭 넘기다가 육성으로 작은 탄성을 내뱉고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추슬렀다. 그리고 불과 몇 십분 뒤, 무대 위에서 말하고 노래하며 '실존하는' 그를 마주하니 진지한 장면에서도 행복한 미소가 감춰지질 않았다. 떨리는 두 손으로 들어올린 맘브리노의 황금투구를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행복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류동키처럼 말이다. 





1층 2열 중블.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배우의 표정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 류배우님을 알게 된 지도, 무대 위에서 직접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무려 3개월 만에 처음 만나뵙게 된 얼굴이었다. 회색 가발과 수염을 뒤집어 쓰며 금세 가려버리긴 하지만, 세류반의 얼굴과 커튼콜 때 류배우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다. 아쉬웠던 건 공연 중 류배우의 시선처리가 묘하게 자리 오른쪽, 그러니까 중블 정가운데로 집중되어서 시선이 거의 맞부딪히지 못하는 자리의 나는 극에서 살짝 엇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문제의 거울씬. 중블 앞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내리는 상황이 벌어져서 조금 우스웠지만, 그 와중에도 류동키의 무너지는 모습을 보겠다고 인상을 찌푸리며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음향은 크게는 들리지 않지만 깔끔하다. 자첫 때는 잘 들리지 않았던 앙상블들의 노래 가사가 정확하게 전달됐다. 





이 날의 캐스트. 류정한, 린아, 김호영. 류동키와 세류반테스, 린돈자, 호초 라고 부르면 되려나. 



※스포 있음※



일단 호초는 정말 사랑스럽다. 류동키가 "어이구 내 새끼, 귀여움을 타고 났구나!!" 하는데 정말 공감 됐다. 넘버 좋으니까도 가사 의미 그대로 몸동작을 해서 집중도를 높였고, 애드립 역시 사랑스럽게 소화했다. 훈초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색달랐다. 린돈자는 미도돈자보다 더 억척스러운 이미지여서 좋았다. 첫 넘버 다 똑같아도 훌륭히 소화해서 만족스러웠고, 풍부한 표정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런 가발을 썼는데도 어쩜 그리 예쁘신지. 교회 가는 장면에서 안토니아와 가정부를 양 옆에 끼고 눈까지 질끈 감아가며 열렬히 제자리뛰기를 하는 류배우님 표정에 빵 터져서 한동안 킥킥댔고, 이발사가 갑옷을 닦아 주며 많이 낡았다는 신선한 애드립을 칠 때 순간 현웃이 스친 표정도 포착해서 즐거웠다. 자첫 땐 '라만차의 사나이'에서 울었는데, 이날은 '둘시네아'에서 갑자기 벅찬 감정이 솟아 눈물을 떨궜다. 오랜만에 풍성한 소리로 류배우님의 노래를 들었더니 황홀하더라ㅠㅠ 그 목소리와 노래를 내 귀에 박제해놓고 수시로 돌려듣고 싶다...... 흡. '맘브리노의 황금투구' 때도 비슷한 맥락으로 울었는데, 정말 너무나도 행복한 류동키의 표정이 고스란히 심금을 울렸다. 그토록 행복함이 가득한 표정은 '연기'일 수가 없다. 하아, 나 이 문장 쓰면서 왜 또 우니......ㅋ...





그나저나 화요일이라 그런지 세류반테스가 대사를 좀 씹었다. 극 초반 지하감옥으로 내려와서 했던 대사 몇 개가 살짝 뭉개졌고, 후반부에서는 대사 한 줄을 제대로 버벅댔다. 류동키의 경우는 워낙 나이 지긋한 노인이다보니 발음이 뭉개지면 뭉개지는 대로 생동감이 더해져서 괜찮았다. 세류반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지만, 종교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보였다. '즉흥으로' 마무리 지은 극의 마지막 장면에 그다지 만족스러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0801 류동키 시즌 첫공에서는 현재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다는 만족감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의외였다. 산초에게 건네는 대사, "용기를.." 역시 상당히 흔들리는 목소리였고, 도지사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는 형제요!" 라는 격려에도 "신이여 도우소서!" 라며 매우 불안하고 두려운 표정과 대사처리를 했다. 정말 억지로 떼는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에게 들려오는 노랫소리.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 싸움 이길 수 없어도 / 슬픔 견딜 수 없다해도 /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 힘껏 팔을 뻗으리라 (...)"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달리듯 남은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그 발걸음에서 두려움은 많이 지워졌다. 희망찬 결말까지는 바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결연한 의지는 단단히 가슴에 붙들고 나갔다. 지난 0801 공연에서는 정말 희망차게, 거의 해피엔딩이란 느낌마저 받을 정도로 힘차게 뛰어올라간 세류반 덕분에 오히려 현실감이 결여된 채 커튼콜을 맞이했었다. 개인적으로는 0901 노선이 더 마음에 든다. 애초에 이 극 자체가 아주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굳이 교훈과 희망이 짙게 전제된 결말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리 낙천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2막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은, 불편하고 답답하고 먹먹하다.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텅빈 무대 뒤로 시선을 던지는 작은 새 장면은 지독한 무기력감을 느끼게 만들고, 흐릿하게 멀어지는 노새끌이의 웃음소리와 겹치면서 등장하는 류동키의 웃음소리 또한 역겨울 정도로 지독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화사한 해바라기 장면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만신창이가 된 알돈자의 절규와 원망. 그런 알돈자를 보며 현실을 부정하듯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지으며 "그래도 당신은 나의 둘시네아 / 당신의 나의 레이디" 라고 같잖은 말만 중얼대는 기사, 돈키호테. 결국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하고 일순간 몰아치는 현실의 주입에 정신을 놓아버린다. 도피 끝에 알론조 키하나가 자기방어기제로 만들어낸 건 '그저 꿈이었다'는 긴 탄식이다. 삶의 마지막에서야 다시 꿈을 꾸고 새로운 모험을 찾으리라 말하지만, 노래를 채 끝내지도 못하고 휘청 쓰러지고 만다. 신부님의 송가 끝, 알돈자는 벌떡 일어나며 말한다. "사람이 죽었네요. 난 저 사람을 몰라요." 자첫 때는 알돈자가 만들어갈 새로운 이야기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무척 냉혹하고 현실적으로 들렸다. 키하나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선택했던 '돈키호테'라는 정체성을, 그가 가장 사랑했던 레이디가 내쳐버린 느낌이었다. 아무리 알돈자와 산초의 마음 속에 돈키호테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이 살아 숨쉴 수 있게 만든 알론조 키하나는 완벽하게 지워져버린 듯해 허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결국 남은 이들의 삶은, 어떻게든 이어져 나가기 마련이라지만 말이다.



이토록 현실적인 극의 전개와 연출은 분명 망연함과 허무함을 남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헛헛함은 삶에 대한 긍정과 그래도 해봐야겠다는 의연함을 함께 끌어올린다. '힐링'이라기보다는 '독려'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래서 자첫 때는 '마음에는 들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는 극' 으로 다가왔다면, 이날 공연 끝에는 '뭐든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을 듯한 풍만한 의지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극' 으로 남았다. 이토록 만족스럽고 행복한 기분이라니.





꿈을 쫓고 정의를 추구하며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 사는 미치광이, 돈키호테. 그를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마다, 또한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와 의미를 지닐 것이다. '명작'이라 불릴 만한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 다만, 나는 자주 보진 못하겠다. 힘들어. 이 공연에서 잔뜩 채우고 나온 뿌듯한 의지가 그 효력을 다할 때쯤 다시 만나러 가야지. 그래도 3차까지의 텀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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