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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디큐브아트센터, 2015.09.16 8시 공연





1+1으로 엄마와 보고 왔다. 0801 자첫 때와 같은 캐스트. 류동키, 미도돈자, 상훈초. 



※스포있음※



미돈자 연기가 정말 좋았다. 상당히 지쳐서 체념한 채 살아가던 알돈자는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나타나 다르게 바라봐주는 류동키의 깊은 눈과 마주하게 된다. 둘시네아,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알돈자 내면의 무언가가 요동치며 수면으로 끌려 올라왔다. 1막 끝부분의 우물 옆 장면에서, 자신을 레이디라 부르는 류동키의 말을 혹시 누가 들을까봐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면서도, 본능적인 이끌림에 그에게 더 다가가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그가 하는 말을 궁금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고, 더 나아가 나도 변할 수 있을까, 일말의 희망을 스쳐 지나가듯이 품어본다. 금세 그보다 더한 절망에 떨어지지만 말이다. 절규하면서도 그 아래에는 삶에 대한, 희망에 대한 짙은 포기와 체념을 깔고 있는 그의 넘버 '알돈자'가 그래서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들었다. 지난 관극 땐 가혹한 현실에 대한 끔찍한 마음에 눈만 질끈 감으며 내려앉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들었었는데, 이날은 펑펑 울었다. 아프고 가엽고 자꾸 작금의 현실과 겹쳐 보이고...... 



상훈초는 첫 넘버 맨오브라만차 때는 괜찮았는데, 갈수록 발음을 먹고 뭉개서 몰입이 잘 안됐다. 애드립이 여럿 있어서 극의 재미를 끌어올리긴 하지만, 부디 딕션은 좀 제대로 해주셨으면ㅠ 침대씬에서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멀리서 보고 있는데도 산초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라서 장면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류동키는 갈수록 사랑스러움이 더해진다. 애드립도 많이 변하고. 무어씬 이후 상훈초의 끼어듬에 "그렇게 때려서 아프겠냐 이놈아" 하며 입을 찰싹찰싹 때리는 시늉을 해서 빵 터졌다. 냐아-나 입을 냠냠거리는 모습, 종종거리는 발걸음이 어찌나 귀여우신지ㅎㅎ 하지만 이날은 침대씬이 정말 최고였다. 유언을 남기려는 알론조 키하나로서의 노인 연기가 지난번들과 다르게 조금 더 깊어진 느낌이라 훅 빠져들었다. 깊은 물 속에 푹 잠겨 모두에게 작별을 고하던 그에게 알돈자의 입을 통해서 돈키호테, 본인의 말이 쏟아지듯 흘러 들어온다.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듯, 일순간 벼락 같은 깨달음이 저릿한 전율을 야기하며 극의 정점을 찍는다. "나는 나 돈키호테 / 라만차의 기사!" 다시 모험을 떠나는 나팔을 불어제끼려는 그 순간, 맥없이 한 노인이 쓰러진다. 애써 이끌어낸 찰나의 기쁨만큼 순식간에 내려앉는 아픔과 고통. "돈키호테는 죽지 않았어요." 이를 악문다. "내 이름은... 둘시네아예요." 단호한 말과는 다르게 아파하고 흔들리는 알돈자의 인간적인 표정. 신부님의 추모사가 멀어진다. 


세류반테스는, 세 번의 관극 때마다 모두 달랐다. 이 날 공연의 세류반은, 소심하지만 내면의 강단이 꽤나 단단한 지식인이었다. 도지사가 원고를 불태우려고 하자 황급히 달려가서 "적어도 재판은 받아봐야하지 않겠소" 라고 머뭇대듯 소심하게 말하더니, 가장 자신있어하는 '극'의 형태로 변론을 시작하면서 신남과 열정이 뚝뚝 묻어났다. 전쟁터에서 죽어간 친구들을 이야기하며 "왜 죽었는가가 아닌 왜 살았는가를 물었으리라 믿소" (정확하지 않음) 라던 흔들리는 목소리에는 '삶'에 대한 의미를 찾고 부여해주려는 절박한 심정이 묻어났다. 그리고 결말. 재판에 회부되기 직전 극을 완성한 세류반은 변론에 성공한다. 돌려받은 원고를 끌어안은 손이 단단하다. 덜덜 떨고있는 산초의 어깨를 붙들며 굳게 말한다. "용기를...!" 자신에게 용기를 건네는 도지사의 말에 그가 죄수들을 둘러본다.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요." 시간만 허락했다면, 아마 세류반은 죄수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들을 위로하고 북돋아주었을 것 같다. 괜찮다고, 용기를 가지라고. 저 한 마디에 담긴 많은 이야기가 위로로 다가온다. 그리고 알돈자를 연기한 죄수가 선창한다. 피날레. 임파서블 드림. 힘차게 걸어가다 계단 끝에서 위를 바라보며 잠시 멈춘 세류반. 돌아보지 않았어도 좋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죄수들을 둘러본다. 그리고 성큼성큼 환한 빛을 향해 발을 뗀다. 무겁게, 문이 닫힌다.





라만차는 리뷰 쓰는 게 너무 어렵다. 폐부를 찌르는 무언가를 건네받고 내내 벅찬 기분에 젖어있는데, 막상 그걸 글로 풀어내는 일은 지독하게 난해하다. 인생을 돌아보고 고민해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서 더욱 그렇다. 아빠도 한 번 보여드리고 싶은데, 다음달에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일단 내 손에 남은 표는 두 장. 10월초와 막공. 이제 한 달 반도 안남았구나. 류배우님 인터뷰에서처럼 '올 여름을 뜨겁게' 함께 하다가, 이젠 쌀쌀해지는 가을에 벅찬 희망을 전해받으며 같이 나아가고 있다. 이 작품도 떠나보내면 헛헛해지겠지...... 벌써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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