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집 in 두산아트센터 Space111, 2022.04.20 8시 황상호 역 이강욱, 이동욱 역 이형훈, 박영권 역 심완준, 강문실 역 문현정. 반복적이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하루들이 누적되며 무기력과 무의욕이 만성적으로 굳어가고 있다. 원인이야 차고 넘치지만 돌파구는 보이지 않아 막연하던 차에, 운 좋게 시간이 났고 타이밍 맞게 매진극의 표를 구했다. 죽음의 집에 방문해보면 죽음을 마주하고 생을 직시하며 삶을 채워갈 원동력을 조금이나마 얻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나의 무력감은 더 깊고 무심함은 더 짙었던 모양이다. 죽음을 인지하고 나서야 하나씩 소중하게 늘어놓는 일상의 찰나들이 애틋하다기보다 도리어 숨통을 조여왔다. 무대 위의 언어가 무대 밖의 현실을 부정적으로 일깨우고 있음..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in 드림아트센터 4관, 2022.04.08 8시 송상은 로리 시국 때문에 펀홈과 스핏을 전부 놓쳐버린 연뮤덕이기에, 아무리 혐업이 바빠도 이 여성 1인극만큼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봐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체력과 시간을 내어 대학로를 찾았고, 덕분에 기대 이상으로 행복했다. 16년 레베카 이후로 처음 만난 송상은 배우는 예상보다 더 완벽하게 90분을 채워낸다. 호흡, 대사톤, 목소리, 행동거지 그리고 눈빛까지, 오롯이 삼키고 온전히 소화한 이야기 그 자체로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토록 다채롭게 인물을, 감정을, 공간을, 경험을 묘사하고 표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상상하게끔 만드는 멋진 배우라니! 가벼운 웃음과 무거운 찰나의 완급이 텍스트를..

내가 멜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in 스튜디오76, 2022.03.26 6시 강애심 윤희, 강보민 숙자.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끄는 극이었는데, 평도 꽤나 좋아서 폐막 직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보고 왔다. 오랜만에 앉은 객석은 소극장답게 불편했으나, 중간중간 암전이 많고 관객의 웃음도 잦아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맛깔 나는 말투와 자연스러운 행동거지와 익숙하고 평범한 상황 덕분에, 마치 옆집 사는 숙자네와 함께 수다를 떠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었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답답한 대화가 점층적으로 집중을 높였고, 중간중간 과거의 다른 장소로 시점을 옮기며 부드럽게 주의를 환기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재미있었지만, 극 자체만 놓고 보면 만족보다 아쉬움이 앞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입장의 두 여성이..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in 정동극장, 2022.02.02 7시 남명렬 크리스토퍼, 정재은 베스, 오정택 다니엘, 임찬민 루스, 이재균 빌리, 박정원 실비아. 쉽지 않을 극임을 각오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불편한 언어들에 1막 내내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평범하고 일상적인 어휘보다는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현학적인 문장들이 범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비아냥과 비난을 관심과 애정이라 착각하는 이 작디작은 '부족' 공동체의 언어적 대사들과 비언어적 행동들에 배려가 부재하여 폭력적이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빌리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폭발하듯 터져버린 2막의 클라이막스가 마땅하고 후련하고 속상했다. 태어날 때부터 ..

리차드 3세 in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22.01.22 6시반 황정민 리차드 3세, 장영남 엘리자베스 왕비, 정은혜 마가렛 왕비, 임강희 앤, 윤서현 에드워드 4세, 박인배 버킹엄 공작 등 전배우 원캐. 황정민 배우의 오이디푸스 연극을 무척 짜릿하게 관극 했던 기억이 생생하여, 다시 돌아온 리차드 3세라는 고전 또한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 후기) 셰익스피어의 작품다운 우아하지만 날카롭고 현학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대사들이 적당한 번역과 각색을 거치며 독특한 매력을 뽐냈다. 그 대사를 맛깔나게 살리는 배우들의 톤이 이야기를 한층 쫀쫀하게 만들었다. 특히 객석을 향해 수차례 독백을 하는 황정민 리차드의 대사톤이 어찌나 몰입을 끌어올리는지, 그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관객들은 그저 휘어잡힐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