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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in 정동극장, 2022.02.02 7시

 

 

 

 

남명렬 크리스토퍼, 정재은 베스, 오정택 다니엘, 임찬민 루스, 이재균 빌리, 박정원 실비아.

 

 

쉽지 않을 극임을 각오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불편한 언어들에 1막 내내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연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평범하고 일상적인 어휘보다는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현학적인 문장들이 범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비아냥과 비난을 관심과 애정이라 착각하는 이 작디작은 '부족' 공동체의 언어적 대사들과 비언어적 행동들에 배려가 부재하여 폭력적이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고 있지 않은 빌리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폭발하듯 터져버린 2막의 클라이막스가 마땅하고 후련하고 속상했다.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한 빌리가 "청각장애인이 아니"라며 "들을 수 있는 아이"로 키웠다는 양육자의 폭언이 어찌나 충격적인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에게 필요한 언어를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대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을 강요하는 교육은 폭력이다. 멋대로 규정한 평범과 어긋나있는 이들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오만함과 무례함이 얼마나 비참한 학대였을지, 그 학대에 소극적으로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침묵한 비겁함이 얼마나 숨 막히는 감옥이었을지, 암담하고 아득하여 힘들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거야"

 

 

수화는 폐쇄적인 청각장애인의 집단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라며 절대 배우지 못하게 했기에, 빌리는 상대의 입술을 보고 말을 읽는 순독에 능하게 된다. 들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는 집단 안에 폐쇄적으로 갇혀 살아야 했던 빌리가 말한다. 순독은 어렵지 않다고. 점과 점 사이를 잇는 것뿐이라고.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들 사이를 채워 넣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빌리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비디오 속 인물들의 대화를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보정하는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눈치로 짐작하고 가늠하여 들리지 않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것이 당연한 삶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한 채 다른 사람의 얼굴과 입술을 빤히 바라봐야만 했던 빌리의 고단함이 아득하다.

 

 

 

 

이 극은 청각을 잃어가고 있는 실비아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장애를 보여준다. 비장애인이 전부 다 다르듯이, 장애인도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는 집단의 일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위치와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생각과 관점을 지닌 개별적인 인간들이다. 고민의 질감이 같지 않고 바라는 지점이 다르다. 청각을 잃어가는 공포를 홀로 마주해야만 하는 실비아의 절망과 고독이 막막하다.

 

 

※스포있음※

 

 

배우들이 빠짐없이 연기를 잘해서 이야기에 한층 더 깊게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 없이 테이블 한쪽에 앉아있으면서도 섬세한 표정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균빌리의 연기가 참 좋았다. 클라이막스에서 자연스러운 수화로 막힘 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얼굴 가득 소리 없이도 맹렬한 감정이 이글대며 분출됐다. 빌리가 보청기를 빼는 순간 삐- 하는 이명과 함께 가족들의 목소리가 음소거되고, 청각이 있는 혹은 있었던 사람처럼 어눌하지 않은 발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사한다. 오정택 배우는 <자기 앞의 생>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 극에서의 연기도 좋았다. 환청으로 인한 예민함과 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말을 더듬는 증상으로 절정에 달하게 되기까지 차곡차곡 쌓아가는 연기가 특히 설득력 있었다.

 

 

극의 결말이 찝찝한 것까지 연출의 의도일까. 결국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다시 마주하는 빌리에게, 그들 중 아무도 먼저 수화로 말을 걸지 않는다. 그저 비언어적인 행동으로 그를 끌어안고 토닥일 뿐. 사랑해, 라는 말이 수화로 무엇인지 묻는 다니엘의 노력만이 빌리를 위해 그들이 노력한 최선이라는 점에 마음이 상했다. 이 부족한 가족이란 부족에게 달라질 여지는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는 것이 현실적이고 불편했다. 여러모로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극이고, 당연하게도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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