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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멜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in 스튜디오76, 2022.03.26 6시
강애심 윤희, 강보민 숙자.
독특한 제목이 눈길을 끄는 극이었는데, 평도 꽤나 좋아서 폐막 직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보고 왔다. 오랜만에 앉은 객석은 소극장답게 불편했으나, 중간중간 암전이 많고 관객의 웃음도 잦아서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맛깔 나는 말투와 자연스러운 행동거지와 익숙하고 평범한 상황 덕분에, 마치 옆집 사는 숙자네와 함께 수다를 떠는 듯한 편안한 기분이었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답답한 대화가 점층적으로 집중을 높였고, 중간중간 과거의 다른 장소로 시점을 옮기며 부드럽게 주의를 환기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재미있었지만, 극 자체만 놓고 보면 만족보다 아쉬움이 앞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입장의 두 여성이 각자가 겪어낸 삶의 고충을 토로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연민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갈등의 근원은 외면했고 본질적인 해결 또한 그려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의 중후반부터 느끼기 시작한 불편함은 결국 결말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들의 한탄과 후회가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이해가 되기에 눈물은 났지만 가슴은 뻐근하게 답답하기만 했다.
함께 사는 며느리가 멜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도, 따로 살며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는 딸의 딸이 먹고싶어한다는 이유로 그 멜론을 홀랑 줘버린 시어머니는 겸연쩍음에 버럭 언성을 높인다.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나의 힘겨움도 알아달라고 푸념하고, 나 때는 더 힘들었다며 며느리의 노력을 깎아내리고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시어머니의 현실적인 방어기제는 갈등의 현상만을 보여주는데 그친다. 자신의 고충만을 얘기해도 90분이 모자랄 며느리는 굳이 장남이라는 위치의 남편이 겪는 괴로움을 언급하며 시어머니의 죄책감을 부채질하고 그리하여 본질에서 빗겨 난다.
불통을 경험했기에 언어가 퉁명해지고, 불만족이 기본값이기에 말에 비아냥이 뚝뚝 묻어난다. 티격태격 잘 사는 것 같은 겉보기는 일상을 통해 내재된 생존의 방식일 뿐, 내면에서는 솟구칠 방향성을 잃은 분노와 좌절감이 마음을 갉아먹으며 곪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극의 목적이 현실에 있을 법한 고부관계 하나를 보여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면, 결말의 대사가 달랐어야 한다. 다음 생에는 반대로 해보자며, 네가 시어머니고 내가 며느리로 살아보자고, 투닥이면서도 재미지게 한 번 살아보자고, 그렇게 말해서는 안됐다. 사과를 해야지. 나도 물론 힘들었지만 너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위로는 이해에서 시작하고 존중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는데, 이 결말은 끝까지 자기중심적이 아닌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극이었는지 못내 혼란스럽기만 하다.
다음 생에 역지사지의 관계로 다시 만나자는 건 일견 배려 같기도 하겠으나, 시대가 바뀌어도 결국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권력관계는 구조적으로 변함이 없으리라는 굳건한 전제가 느껴져서 불편했다.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에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구조적인 문제를 정확히 직시하고 조심스럽게 다뤘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날 누군가의 며느리였던 이와 함께 관극했다. 극 중간에 며느리의 어깨를 툭 치며 "미안해" 라고 말한 시어머니의 사과에 답답하던 가슴이 갑자기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던 엄마는, 결말에 따라 같이 펑펑 울며 이해할 준비가 다 되어있었노라 말했다. 하지만 사과 대신 흘러나온 넋두리 같은 애도에 마음이 차게 식었다고 했다. 연민이 동정에 그치지 않고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길 바랐는데, 그 점이 너무 아쉬웠다고 말이다.
다분히 한국적인 이 극이 언젠가 다시 올라오게 된다면, 이 아쉬움을 다독여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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