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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in 드림아트센터 4관, 2022.04.08 8시

 

 

 

 

송상은 로리

 

 

시국 때문에 펀홈과 스핏을 전부 놓쳐버린 연뮤덕이기에, 아무리 혐업이 바빠도 이 여성 1인극만큼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봐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러 체력과 시간을 내어 대학로를 찾았고, 덕분에 기대 이상으로 행복했다. 16년 레베카 이후로 처음 만난 송상은 배우는 예상보다 더 완벽하게 90분을 채워낸다. 호흡, 대사톤, 목소리, 행동거지 그리고 눈빛까지, 오롯이 삼키고 온전히 소화한 이야기 그 자체로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이토록 다채롭게 인물을, 감정을, 공간을, 경험을 묘사하고 표현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상상하게끔 만드는 멋진 배우라니!

 

 

가벼운 웃음과 무거운 찰나의 완급이 텍스트를 통해 구성되고 배우로 인해 완성된다. 천진한 목소리의 결을 바꿔내는 로리 그 자체도 다채롭지만, 여정에서 만나는 이들의 음성과 표정 그리고 분위기의 다양함이 1인극 화자의 담백함을 보다 입체적으로 만든다. 맨몸으로 무대 위에 내던져진 채 혼자의 힘만으로 모든 걸 이끌어나가야 하는 1인극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웃음과 공감과 연민과 슬픔과 후련함을 골고루 끌어내는 이 배우의 힘에 감탄하며 반하고 왔다. 무대에 선 것 자체도 오랜만이라고 알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고 앞으로도 자주 다시 만나고 싶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서있는 소녀가 방금 막 아빠를 잃었다기엔 과하게 발랄한 어조로, 하지만 납득이 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빠를 추억하고 애도하며 한 뼘 더 성장하기에 이르는 흐름과 구성이 유려하다. 새로운 또래집단에 발을 담가 일탈을 맛보고, 그 경험을 통해 문득 자신과 같은 상황과 감정을 공유했을 수천만명의 여성들이 그렇게 이어져있음을 인지하고,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겨 모험을 계속하는 일련의 과정이 로리가 성장토록 한다. 좋은 어른을 만나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반성하며 또다시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되는 모습이, 이 동화 같은 극을 한층 더 따뜻하게 만든다. 지구온난화와 녹고 있는 빙하, 그로 인해 죽어가는 북극곰 이야기에 피가 식다가도 좋은 사람들의 존재에 인류애를 조금이나마 충전하게 되는, 그런 극이다.

 

 

무엇보다 이 극은 관객도 로리와 함께 북극까지의 여정을 공유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추운 걸 싫어해서 북극 여행에 대해 크게 로망이 없었던 나였는데, 온통 얼음과 눈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이 세상에 혼자 있는 듯한 짜릿함을 만끽하는 그의 표정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어느 방향을 둘러봐도 새하얗고 새하얀 산과 바다, 그 흰색 속에 온갖 색들이 가득 차있는 것을 깨닫고 "난생 처음으로 진짜 색깔들을 보고 있"음에 전율하는 로리의 반짝이는 얼굴에 그 온 빛깔이 스친다. 어느새 추위도 잊고 나도 그의 옆에 서본다. 뽀오드득 하며 아무것도 없던 자연에 작디작은 발자국을 남겨보는 걸 상상한다. 그 어떤 인간이 없는 곳에서 요란스런 고요함으로 녹았다 얼었다 깨지는 얼음의 목소리를 아득히 그려본다. 숨마저 얼어붙는 차디찬 공기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보라를 파부로 느껴본다. 그 순간 나 역시 북극의 끝자락에 서있다.

 

 

 

 

아빠가 해줬던 이야기를 되짚으며 마지막으로 아빠와 함께 하는 모험. 그 과정의 문장들은 사랑스럽고 아득하며 막막하고 무한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탐험가들은 대부분 그곳에 남겨졌다고, 깊고 두텁고 차가운 북극의 얼음은 거대한 시체보관소나 다름없다는 로리의 말에 근래의 사적인 경험이 포개져 숨이 턱 막혀온다. 북극으로 떠난 모험가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했기에 5년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내의 이야기에, 보고 듣고 함께 상처입었던 수많은 삶들이 스쳐가며 심장이 내려앉는다. 차디찬 바닷물 속에 침잠하듯이.

 

 

모든 손가락이 고드름으로 변해버린 양손을 이미 죽어 있는 북극곰의 이미 열려 있는 따뜻한 배 속에 집어 넣는, 그리하여 온전한 손가락으로 돌아왔으나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양손을 내려다본다. 내뱉지도 않은 숨이 몸 안에서 얼어붙기 시작하여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온몸이 얼음과 동화된다. 날카롭고 잔인하게 묘사되는 로리의 무의식은 객석으로 전이된다. 마스크 속 좁고 텁텁한 공기에 숨이 답답해진다. 그 안에 맺힌 작디작은 물방울이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인다. 조여드는 숨통에 어지럽고 갑갑하여 눈물이 핑 돈다. 인간의 이기에 눈물이 흐르고야 만다. 미안해, 고마워, 너무 미안해.

 

 

 

 

드넓게 펼쳐진 자연을 마주하는 찰나의 비일상에서, 남겨두고 온 곳에서 이어지고 있을 일상을 떠올린다.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일상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그럼에도 모든 것이 변해버렸음을 절감한다. 다시 시작될 일상에 언제나 그 새하얀 눈이 함께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떠나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버린 일상을 새로운 힘으로 마주한다. 일상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모험의 이유를, 여행의 의미를 되새긴다. 계속되는 비일상이 당연해져 버린 일상으로 인해 빼앗겨버린 일상 속의 비일상이 사무치게 그립다.

 

 

마땅히 누리던 비일상이 간절하다 못해 절박한 이들은 부디 북극으로 향하는 로리의 모험에 동참해보길, 그리하여 잃어버린 일상의 파편을 조금이나마 다시 맛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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