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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2024.12.06 7시반
조형균 시라노, 나하나 록산, 임준혁 크리스티앙, 이하 원캐. 시라노 삼연 총첫공. 시라노 초재삼연 28차 관극.
시라노가 돌아왔다! 그렇지만 나의 시라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극으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넘버들도 돌아오지 못했다. 눈물은 흘렸으나 5년 전, 7년 전의 감정과는 사뭇 달랐다. 어떤 재회는 벅차올랐고 어떤 변화는 헛헛함을 자아냈다. 빈틈없이 꽉꽉 채워 넣은 개연성은 이해도와 피로도를 동시에 높였다. 새롭게 추가된 설정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느라 흥분했지만, 나의 영혼을 뒤흔들던 시라노가 돌아오지 않았음에 못내 슬퍼졌다. '달토끼였던' 관객으로서, 초연과도 재연과도 다른 극이 되어버린 삼연의 시라노가 반갑고도 아쉽다.
"진정성이란 말이 무색해진 이 시대 시라노는 최후의 낭만주의적 영웅으로 남아있습니다. (...) 일상 속에서 작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진정성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바로 영웅입니다." 나의 시라노이자, 이번 시즌은 프로듀서로서만 참여한 류정한 배우님의 말이다. 관극을 해보니 바로 이 지점이 삼연 시라노의 각색 및 제반 연출의 근간이더라. 삼연의 시라노는, 영웅이다. 단순한 전쟁 영웅 이상으로, 권력의 수탈에 지친 이들을 보듬고 큰 목소리로 그들을 대변하는 서민의 영웅이다. 갈 곳 없는 거친 가스콘 대원들을 기꺼이 제 밑으로 거두는 이상적인 리더이기도 하다. 이토록 거시적인 영웅적 면모가 휘황하게 묘사되다 보니,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사적인 파편으로만 남겨지고 말았다.
시라노의 다면적인 특징 중 '영웅'에 방점을 둔 이번 삼연은,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캐릭터 역시 견고하게 구축한다. 록산은 집안의 파산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크리스티앙은 단순함 너머 나름의 고민과 지향점을 지닌 사연 있는 남성으로 재탄생했다. 추가된 서사는 인물 개개인을 보다 선명하게 그려냈으나, 이 작품의 중심 소재인 세 사람의 관계성은 초재연에 비해 흐릿해졌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제 펜을 내어주는 '대필'이라는 소재와 서로를 고스란히 이해하게 된 세 영혼의 교감은, 삼연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 멋진 록산과 위대한 시라노와 애틋한 크리스티앙만 남겨졌을 뿐이다.
★스포 있음, 초재연 관극러에게도 스포임★
삼연의 시라노는 전쟁의 기운을 물씬 풍기며 보다 무겁고 진중하게 시작된다. 르브레와 라그노의 만담으로 시작되는 재연과 확연히 다르게, 삼연은 웅장한 오케의 극적인 오버츄어와 함께 편지를 읽는 시라노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전반적으로 인물의 실루엣을 활용한 영상이 많은 점도 준엄한 시대의 분위기를 한층 부각한다. 첫 넘버 '연극을 시작해' 는 달라진 무대에서 달라진 가사와 달라진 앙상블 캐릭터 구성으로 펼쳐진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한 초연과 대놓고 권력자들에게 아부하는 연극을 펼친 재연의 몽플뢰리는, 캐릭터 자체가 없어졌다. 대신 전쟁에서 무사히 귀환한 전쟁 영웅들을 위한 헌정 무대가 펼쳐진다는 설명이 덧붙었다. 시라노의 가스콘 부대는 아직 파리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정보와 함께. 유모의 입을 통해 록산이 파산한 집안을 위해 드기슈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설정도 설명한다. 유모는 록산에게, 발베르는 드기슈에게 "이 또한 연극"이라며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연기하라고 조언하는 장면도 생겼다.
눈과 코를 완전히 가리는 새하얀 가면을 쓰고 난입한 시라노의 '나의 코' 와 '터치'. 전쟁터에서의 비겁한 드기슈 모습을 생생하게 나열한 시라노가 이어가는 터치 넘버의 가사도 꽤나 적극적인 비아냥으로 바뀌었다. 르브레는 이 넘버가 끝나고서야 첫 등장을 한다. 줄곧 붉은 커튼으로 닫혀있던 무대 왼편의 작은 무대가 잠시 열리며 록산이 등장하는 '록산' 넘버 연출은 불호. 전반적으로 어두운 이 넘버의 연출에서 시각적인 집중 효과를 주긴 했으나, 록산을 대상화한다는 인상 또한 받았기 때문이다. 재연의 '완벽한 연인' 넘버 후반부 록산 등장 연출과 비슷한 맥락으로 불편하더라. '록산' 넘버 무대 연출은 초연이 가장 아름다웠어. 반짝이는 별빛 같던 무대 뒤편 조명들 돌려주세요...
초연에서는 군인과 시민들로, 재연에서는 배고픈 시인들로 가득했던 라그노네 빵집은, 삼연에서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가스콘 부대원들이 회포를 푸는 곳으로 바뀌었더라. 빵의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으로 가득했던 '패스츄리와 시' 넘버의 가사 역시 시국을 비판하고 영웅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라그노의 창작시로 변경됐다. 초재연에서는 이 장면에서 록산을 위한 편지를 쓰는 시라노의 모습이 확실히 눈에 띄었으나, 삼연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귀족의 경고를 전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초연은 리니에르라는 인물이 수취한 편지를 통해서, 재연은 파리의 시인들에게 경고를 전하러 온 군인들을 통해서 표현했다. 삼연에서는 귀족들 읽으라고 빵봉투에 저항시를 쓴 라그노의 딸을 잡아오며 경고한다.
이 장면에서 삼연의 시라노는 적극적으로 군인들과 칼싸움도 하고, 나 혼자 상대할 테니 다들 해산하라고 가스콘 대원들에게 명령도 한다. 넘버 시작 전 라그노 부인에게 시라노가 돈주머니를 건네는 건 재삼연이 동일하다. 초연의 시라노는 제 위의 대장을 믿고 날뛰었고 재연의 시라노는 대장임에도 자유분방함이 강했다. 그러나 삼연의 시라노는 보다 강력한 리더십과 진중함을 보인다. 길들여지지 않는 가스콘 대원들은 싸우지 말라는 시라노의 만류에도 재차 싸움을 이어가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순간에는 확실히 복종한다. 권력을 향해 겨눈 칼은 신나게 사방으로 날뛰기보다 매섭게 핵심만 찔러댄다. 시와 운율을 사랑하는 검객 시라노의 본질이, 삼연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초재연과 달라진 수녀원의 모습에 2막의 장면이 절로 상상된다. 왼편의 나무에 푸르른 잎사귀가 달려있고, 오른편으로 둥근 계단이 놓여있다. 갑작스러운 신부님의 등장에 의아했으나, 1막 후반부에 결혼식 주례로 활용되는 캐릭터더라. "시라노는 올 거야.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어." 라는 록산의 대사는 재연과 동일하다. "수천 개의 별똥별"이나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두 팔과 다리를 물어뜯긴다 해도" 라는 시라노와 록산의 언어 또한 유지된다. 시낭송 모임을 가던 초연의 록산은 여성문학지를 만들던 재연을 거쳐 전쟁고아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삼연에 이른다.
이 장면에서 설정이 어마어마하게 추가됐다.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로 록산과 시라노의 연락은 끊겼었다. 전쟁으로 많아진 수녀원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록산이 변명한다. 그런 록산을 향해 여자애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을 "꽉 막힌" 그의 아버지는, 시라노의 스승이자 왕실 최고의 검술사였다. 록산과 시라노가 처음 만났던 날은, 마치 오늘처럼 초승달이 떴던 날이었다. 록산은 시라노가 외계인인 줄 알았다고. 밀수꾼들과 싸우다가 소금 부대를 터뜨린 시라노가 하얀 소금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달나라에서 떨어진 천사인 줄 알았다고. "지구에서의 삶은 갈수록 고달파진다"는 록산의 대사도 추가됐다. 극의 시대상에 어울리는 대사인지는 의문이다.
'거인을 데려와' 넘버를 들으면서도 멀끔했던 내 얼굴이, '벨쥐락의 여름' 을 들으며 눈물로 얼룩지고 만다. 찬란한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전주가 흐르는 순간, 열과 성을 다해 사랑했던 초연과 재연의 류라노와 그 시절의 내 마음이 차올랐기에.
드기슈를 향한 시라노의 훈계가 보다 거창해졌다. 모자가 겹겹이 꽂힌 칼을 던지며 조롱하는 장면은 없어졌다. 가스콘 부대의 여앙들은 무대 뒤쪽 중앙에서 장총을 겨누다가 잠시 퇴장한 뒤 돌아와서 넘버 후반부의 추임새에 맞춰 북을 친다. 초재연은 탭댄스로 웅장함을 더했는데, 이번 시즌은 느낌이 덜 살아서 아쉽더라. 2막 '순앤가스콘' 넘버에서 시라노가 깃대를 바닥에 칠 때도 쿵 소리가 아닌 고무 덧댄 보호구의 텅 소리가 나서 몹시 별로다. 소품의 편의성을 추구하는 건 알겠지만, 이런 부분은 타협하지 말아 달라.
가스콘 부대를 해체하겠다는 드기슈의 선언과 당신은 그럴 권한이 없다는 시라노의 말을 들으며 이 시국이 겹쳐진다. 시적이던 초재연의 대사는 온데간데없고, 현실비판적인 대사가 극을 점령했다. 시라노와 가스콘을 무지막지하게 존경해서 입대한 크리스티앙의 조롱 아닌 조롱은 많이 희석됐다. '말을 할 수 있다면' 넘버는 완전히 가요풍으로 바뀌어서 당황했다. 재연 가사가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우아하게 스스로를 조소하던 크리스티앙의 언어가 사라져서 극의 묘미가 줄었다. 2막의 '크리스티앙의 이별 편지' 넘버도 가요풍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니 삼연 티앙이들이 이전 넘버를 얼마나 소화하지 못한 건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이날 객석에 계시던 작곡가님 붙들고 물어볼 뻔했음.
초재연에서는 무대 오른편에 비스듬히 있던 록산의 집은, 삼연에서 무대 정중앙에 대칭으로 커다랗게 놓여있다. 무대 테두리와 록산 집 테라스에는 큼지막한 장미들이 가득하다. 무대는 예쁘지만, 비대칭에서 오는 어긋난 시선들의 방향이 전혀 부각되지 못한다. 제 진실된 모습을 어둠 뒤편으로 감춰버리는 시라노의 위선, 본질 대신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록산의 편협함, 자신의 언어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크리스티앙의 비겁함. 어긋나 버리는 운명의 찰나가, 초재연의 무대에서 더 극적이고 아름답게 은유됐다고 생각한다. 대칭이란 오롯이 완전해 보이는 구성이기에, 이 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안녕 내 사랑' 이나 '그의 입술이 전한 나의 사랑' 넘버가 이전 시즌만큼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삼연의 최고 불호, '달에서 떨어진 나' 넘버 돌려내라. 삐리빠라뽕을 외치며 달에서 떨어진 달토끼의 황망함을 드러내던 이 넘버가, 삼연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와웅와웅와웅 하면서 달나라가 얼마나 하얀지 네가 아냐는 대사로 바뀌었다. 벨쥐락 직전에 늘어놓은 설정뿐만이 아니라, 두 달간 주고받은 편지 속 '왈츠를 배우고 싶다'는 록산의 편지 내용과 연계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절절하고 절망적인 시라노의 감정이 와닿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와 결혼하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 시라노의 처절한 마음이 유쾌한 리듬과 선연한 대비를 이루던 초재연의 달떨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새하얀 가면을 쓰고 빨간 장미 덩굴을 어깨에 멘 시라노와 앙상블의 모습은 과하게 예술적이다.
핑크색 드레스와 편안한 바지를 입었던 록산이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시라노 앞에 무릎 꿇은 채 간절히 부탁한다. 크리스티앙을 지켜달라고. 나에게 그러했듯 형제처럼 그를 지켜달라고. 이 부분이 2막에서 시라노를 '형'으로 부르는 크리스티앙으로 이어질지는 꿈에도 몰랐죠. 다른 웃음포인트는 재미있게 잘 봤는데, 이 장면은 너무 힘들었다. 대장인 시라노를, 형처럼 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형으로 호명하는 크리스티앙이라니. 2막은 재연 대비 많이 바뀌진 않아서 새록새록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우는 대신, 강가 저 너머를 경계하며 보초를 서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입양된 처지에 친아들인 동생이 태어나서 소외됐다는 크리스티앙의 고백과 자신의 아버지는 소금 광부라는 시라노의 설명도 추가됐다.
전쟁터까지 찾아온 록산의 서사도 바뀌었다. 동정심에 호소하던 초재연과 다르게 집까지 팔고 출발한 삼연의 록산은, 소금 밀수꾼을 자처하며 "네 급여보다 비싸다"고 소금 한 포대를 던져주며 검문을 통과했다고 설명한다. 가끔 먹히지 않으면 직접 싸움을 했다고도 한다. 소금세를 언급하며 시대상을 강조하는 부분도 추가됐다. 2막 후반부에서는 시라노의 곁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넘버 중 뒤편에서 칼싸움을 하기도 한다. 너무 가벼워진 넘버 때문에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 점이 아쉽다. 하지만 '순앤가스콘' 넘버는 여전히 벅차게 찬란했다. 무대 중앙의 회전무대는 양 옆으로 계단이 있고 가운데가 경사면이었는데, 묘하게 남한 지도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의도일까.
크리스티앙의 죽음 15주기의 날. "26일"이라는 구체적인 일자가 없어져서 아쉽더라. 수녀들의 대사도 늘었고, 록산의 의상도 상복인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녹색으로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며, 이제는 같이 목검도 만든다. '최고의 남자' 넘버를 부르며 목검 손잡이를 끈으로 둘둘 마는 연출이 추가됐다. 록산이 시라노 얘기를 할 때면 웃는다는 드기슈의 대사가 두 번으로 강조된다.
시라노는 록산의 옛 집을 지나며 계절에 맞지 않고 "꼿꼿이 서있"기까지 한 빨간 장미를 뿌리 채 뽑아온다. 벤치에 놓아둔 이 장미를, 후반부에서 달나라에 가져갈 "내 마지막 영혼"을 언급하며 록산에게 다시 건넨다. '안녕 내 사랑' 넘버는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재차 묻는 록산의 물음에 "정말 말하고 싶었다"는 시라노의 대사가 추가됐다. 몹시 불호다. 결코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시라노의 신념이 왜 여기서 이토록 맥없이 무너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나아가리 나아가리" 하고 허망하게 픽 쓰러졌던 초재연과 다르게, 삼연의 시라노는 객석을 등진 채 커다랗게 차오른 달을 향해 오른팔을 뻗어 나아가다가 록산의 품에 안기듯 무너진다. 지독히도 쓸쓸하고 허탈하게 보였던 시라노의 죽음이, 보다 애틋하고 다정하게 바뀌었다. 평생 좇던 달을 향하다가 쓰러진 삼연의 시라노와 꼿꼿하게 신념을 지향하다 인간답게 스러진 초재연의 시라노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턱 막히는 숨에 정신이 혼미했던 초재연과 비통과 안쓰러움이 앞서는 삼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척 다르게 다가온다. 눈물을 쏟으며 따라 부른 커튼콜의 브링미에 담아낸 감정은 덜 복잡하여 더 직관적이다. 그래서 아쉽다. 내가 무대를 사랑하는 이유는 직관적인 교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데.
달나라에서 떨어진 '달토끼'는 없어진 삼연에서 새로 부각된 단어가 있다. 보석이다. '누군가' 넘버가 끝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시라노의 물음에, 록산은 "스치는 순간도 잘 세공하면 운명이라는 보석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냐며 시라노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니 내 검이 되어달라"고 부탁까지 한다. 그리고 이는 2막에서 "당신의 진실한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크리스티앙을 향한 고백과 이어진다. "당신의 영혼은 그 어떤 보석보다 고귀해요" 라는 록산의 대사 또한 삼연에서 추가됐다. 진실한 사랑이 보석에 비유되는 것이 시라노라는 인물과 어울리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1막과 2막을 넘나들며 구축한 과하게 디테일한 이 설정들은, 개연성을 추구미로 삼는 텍스트 덕후의 손에서 탄생한 각색임이 분명하다.
모던하고 세련된 초연과 가볍고 명확한 재연은 완전히 다른 극이었다. 투박하고 고급지며 연극적인 삼연은, 보다 묵직하고 직관적으로 묻는다. 이 시대의 영웅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특출 난 개인만이 아니라, 평범한 너와 나 역시 충분히 그 영웅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노라고. 그러니 타협하지 않고 위대한 거인들과 맞서 싸우자고.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그렇게 불합리한 시대에 저항하고 부조리한 권력을 끌어내리자고. 결코 신념을 포기하지 말자고 말이다. (초라노 재라노 비교 후기)
1막 '페스츄리와 시' 넘버가 끝나고 칼을 허리춤에 넣던 쌀라노가 실수로 친 단검이 OP 3열 부근으로 날아갔다. 베테랑 쌀라노는 자연스럽게 극을 이어갔고, 내 오른쪽 뒤편 객석에 앉아있던 류로듀서는 1막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그쪽으로 뛰어가 관객의 상태를 살폈다. 소품이 많이 사용되는 극인 만큼, 여러모로 조심할 필요가 있겠더라. 경력직 시라노와 록산 덕분에 보다 편안하게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류정한 배우님이 바로 뒷열에 앉아있음에도 오롯이 극에 집중했고, 배우님이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로비에서도 꿋꿋이 기록에 충실했다. 그만큼 내가 이 극을 사랑하고, 또 아낀다. 비록 내 시라노는 오지 않았으나, 이 극이 전하고자 하는 가치에 여전히 깊이 공감하고 공명한다.
한겨울에 비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쳐도 위법한 거인들과 맞서기 위해, 나는 또다시 추운 거리로 나선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권력을 사유화하는 기득권에 저항하며. 저 달을 향해 오롯이 나아가며 내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이대로 난 앞으로 나아가리, 나아가리.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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