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2019.08.17 7시반)
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19.08.17 7시반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류라노, 지연록산, 런티앙. 재연 류라노 자둘.
2년하고도 일주일 전, 초연 시라노 후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영혼을 팔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류배우님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음성을 감히 요구하고 싶다고. 배우님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음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당연하게도 이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했다. 류라노가 넘버의 첫 음을 입에 올리는 순간, 벅차오르는 황홀함에 휩싸인 채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입덕 5년차 정도면 익숙해질만도 한데, 매번 그 익숙함 이상의 어마어마하고 훌륭한 무대를 보여주시니 항상 새로이 치일 수밖에 없다. 팬텀 초연에서 덕통사고를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을 또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재연 첫공은 재회에 대한 반가움에 엉엉 울었다면, 재연 본공 첫공은 류라노의 노래와 해석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저절로 차오르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초연 류라노를 몹시 사랑했지만, 바뀐 재연 류라노의 노선이 몹시 취향이어서 더욱 기쁘고 행복하다.
위에 언급한 초연 후기 뒷부분을 읽어보니 이날 관극에서 생각했던 부분들을 똑같이 짚어냈다는 게 신기하다. 류라노의 기본적인 발성과 톤은 물론이고, 얼론의 디테일이나 마지막 편지에 대한 얘기, 최고의 남자 가사에 정확히 부합하는 노선 등이 오늘 관극에서도 계속 느껴졌던 요소라는 점이 새삼스럽게 놀랍다. 해당 후기. 초연의 해석에 부합하는 동시에 재연의 캐릭터와 어울리는 노선을 풀어내는 류라노의 연기가 벌써부터 경탄스럽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그 깊이가 끝없이 깊어지리란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기대가 된다.
※스포 있음, 초연과의 비교 있음※
재연에서는 오버츄어가 깔리고 르브레와 라그노가 등장하여 인사와 객석의 호응 유도를 한다. 무대 오른쪽의 밧줄을 끌어내리며 막을 열고, 연극을 보러온 앙상블들이 드러난다. 연극을 시작해. 여러 변화가 있지만, "군인에 시인에 난폭한 천재 / 무모한 기발한 그 정신세계 / 용맹한 비범한 전사라네" 라는 시라노 소개가 재연에서는 "군인에 시인에 비범한 존재 / 무모한 기발한 그 예술세계 / 용맹한 위대한 전사라네" 라고 바뀐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또한,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스쳐 지나가며 눈빛만 교환했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두 명의 날치기에게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록산을 크리스티앙이 도와준 뒤 통성명까지 한다. 크리스티앙이 시라노를 동경하여 가스콘 출신도 아니면서 가스콘 부대에 자원했다는 설명까지 덧붙어서, 이어지는 후반부의 전개가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초연에서는 시라노가 나오지 않았는데, 재연에서는 넘버 후반부에 검은색에 빨간 포인트가 있는 후드를 뒤집어쓴 시라노가 무대 오른쪽 여앙들 틈에 섞여 등장한다. 그리고는 그대로 뒷모습만 보인 채 몽플뢰리 연극 무대의 뒤쪽으로 걸어가서 막 너머에 몸을 감춘다.
th발음이 강했던 초연 몽플뢰리와는 다르게, 재연의 몽플뢰리는 추기경이 직접 쓴 연극을 발연기로 진행하며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여준다. 천둥번개 효과음과 함께, 시라노는 희극치곤 안 웃기고 비극치곤 너무 웃긴 이 연극에 목소리부터 난입한다. 나의 코. 가사 속의 언어유희를 시라노가 좀 더 강조할 수 있도록 넘버가 구성되어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다. 몽플뢰리 연극에서 객석의 호응을 유도했던 두 피에로가 이 넘버에서는 시라노를 돕는다. 마치 후광처럼 동그란 조명을 그의 머리 뒤쪽에 켜서 코를 부각시키고, 깃털부채로 몸을 강조하는 등의 도움을 준다. 첫공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이날은 넘버가 끝난 뒤 허리춤에 꽂아둔 지폐를 두 장 꺼내서 그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는 시라노의 디테일을 발견해서 아주 재미있었다. 연극을 비판하는 넘버를 마치 연극처럼 꾸민 이 연출이 극의 재미를 한껏 끌어올렸다.
가볍고도 묵직한,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시라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넘버, 터치. 발베르와 결투했던 초연과는 다르게, 드기슈가 직접 결투에 나서고 후반부에 발베르가 참여하며 2대1로 싸우는 상황이 연출된다. 시라노는 가볍게 두 사람의 칼을 받아내는 동시에, 높은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추기경 예하께 꼬박꼬박 인사를 잊지 않는다. 결국 귀족 나으리들을 쫒아내고 껄껄 웃던 시라노는, 객석의 록산을 발견하고 얼어붙는다. 장소를 직접 정하던 초연과는 다르게, 시라노는 록산이 지정한 장소와 시간을 그의 가정교사로부터 전해 듣고서 그대로 굳어버린다. 호들갑을 떠는 라그노와 르브레가 퇴장하고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넘버, 록산. 무대 왼쪽 계단을 오르며 불렀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텅 빈 무대 위에서 벅찬 전율을 오로지 목소리로만 표현하며 누빈다. 시라노가 넘버 마지막을 무대 안쪽에서 끝내면서, 장면은 자연스럽게 라그노네 빵집으로 전환된다.
초연에서는 군인들과 일반 시민들로 북적이던 라그노네 빵집은, 재연에 와서는 시인들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돈도 되지 않는 시인들을 쫓아내려는 라그노의 부인에게 시라노가 다가와서 돈주머니를 건네면서, 시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시라노의 성격이 한층 부각됐다. 패스트리와 시. 삼행시로 진행되는 시의 향연들이 한층 가볍고 직관적으로 변했다. 초연에서는 이 넘버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시라노가, 재연에서는 빵집을 가로지르며 지나가다가 삼행시의 운을 띄워주는 등의 참여도가 생겼다. 넘버가 끝난 뒤 등장한 군인 세 명은, 귀족들의 명예를 능멸한 시인들이 당장 빵집을 떠나지 않는다면 정확히 백명의 장정을 보내 그 값을 목숨으로 치루도록 하겠다는 경고장을 직접 전한다. 초연에서는 이 부분을 리니에르라는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이 과정을 나중에 확인한 시라노는 분개한다. 지켜야 할 건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말한다. 거인을 데려와. 초연에서는 친구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냐고 묻는 어미였는데, 재연에서는 "모른 척 할 순 없다네" 라거나 "구걸하게 살게 두진 않아" 라는 등 스스로 나서서 방패가 되어주는 어조로 시인들을 감싸주었다. 벌써부터 넘버에 약간의 변주를 넣는 류라노였지만, 정확하게 기억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으로 회전무대가 사용되는 장면이다. 넘버 후반부에 무대 구조물이 위로 올라가고 뒷배경의 색이 바뀌며 극적 효과를 높이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회전무대에 선 류라노가 무대 앞쪽으로 나오는 동시에 뒤쪽으로 일백명의 장정들이 등장하여 극적 긴장도를 높인다.
시라노는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재연 록산의 대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늦은 시라노의 고통을 한층 부각한다. "록산이 부른다면 수천 개의 별똥별처럼 날아와야죠" 라거나,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두 팔과 두 다리를 다 물어뜯긴다해도!" 라는 대사들 역시 2막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이는 영혼을 공유하는 시라노와 록산의 모습을 더욱 강조한다. 검술도 배우고 신분과 계급에 상관 없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여성문학지를 만드는 등의 록산 행보에 대한 설명이 들어갔고, 시라노의 편지가 갑자기 뚝 끊어진 이유를 대사로 넣어서 두 사람이 점차 멀어진 이유를 납득 가능하게 도운 점이 마음에 들었다. 벨쥐락의 여름.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넘버의 가사에 맞는 영상이 활용되었다. 누군가. 록산의 고백이 당연히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는 시라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넘버 마지막에는 아예 자신이 적어온 고백편지를 당당하게 꺼내들기까지 했다. 크리스티앙이 생각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면 어떡할거냐는 시라노의 물음에, 초연 록산은 "죽어버릴거예요" 하고 해맑게 대답하지만, 재연 록산은 "죽을 만큼 절망적이겠죠. 제 두 눈이 진실함을 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하고 담담하게 답한다.
크리스티앙의 뒤를 봐주겠다는 시라노의 약속에 기뻐하며 "고마워요, 사랑해요," 라고 말한 록산의 대답만을 들은 라그노와 르브레는 호들갑스럽게 상황을 과대평가한다. 그들의 과장만큼 시라노의 슬픔은 극대화된다. 잠시 무대에서 퇴장한 시라노의 공백을 채우며, 자기주장 강한 가스콘 부대가 등장한다. 서로 대련을 하고 멋대로 총을 쏘며 자신들만의 규칙을 벗삼는 가스콘 부대는 초연보다 훨씬 정신 사납고 무질서하다. 그들을 비하하는 드기슈 백작을 향해, 시라노는 능청스러운 대꾸를 하며 역으로 그에게 비아냥거린다. 한 대원의 칼을 뽑아 들고 드기슈를 향해 도발을 날리면, 다른 가스콘 부대원이 그 칼에 모자를 끼워넣는다. 전날 일백명의 장정과 맞서 싸운 기념품을 드기슈에게 돌려주는 시라노와 가스콘의 패기가 범상치 않다. 특히 류라노가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를 주자, 신입인 크리스티앙이 용감하게 두 번째 모자더미를 드기슈에게 내던지는 연출이 좋았다.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의 크리스티앙은 가스콘 부대에 소속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음을 넘버의 전후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멍청함이 훨씬 부각된 점은 아쉽지만, 캐릭터적으로는 성장하는 모습이 명확하게 보여서 재연의 크리스티앙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가스콘 용병대. 말해 무엇한 넘버인가. 중후반부의 떼창에 여앙들의 화음이 얹히는 건 좋았으나, 무대 자체를 구성하는 것은 남앙들 위주인 점이 다소 아쉬웠다. 타인의 호응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자신감을 중시하는 가스콘의 모습이 부각되는 재연의 가스콘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에 "간다," 하면서 점진적으로 화음을 쌓는 넘버 구성이 아주 좋은데, 마치 앞으로 들이미는 듯한 빠른 호흡의 적극적인 가스콘의 모습이 2막에도 반복되면서 극적 효과가 높아졌다. 가스콘 넘버 중간에 크리스티앙에게 빠져있으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꼰대 가스콘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넘버 이후 이어지는 크리스티앙의 코그로가 초연에서는 장난스럽고 도발적이었다면, 재연에서는 제 가치를 보여주려는 목적이 넘실대는 패기로 가득했다. "오늘 의가사하겠군!" 하는 초연 시라노의 대사가 없어진 건 아쉽지만,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려는 표정이 훨씬 생생하게 드러나는 건 좋았다. 다 나가라는 그의 말에 같이 퇴장하려는 크리스티앙을 막아선 르브레의 첨언도 재미있었다.
자신의 잘생긴 외모를 잘 아는 크리스티앙과, 그 외모만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으리라 상상하는 시라노의 동상이몽이 듀엣 넘버 직전에 대사로서 많이 추가되었다. 완벽한 연인. 류라노가 품에서 편지를 두 장 꺼내드는데, 크리스티앙을 대신하여 편지를 많이 썼다는 것을 드러내는 디테일인 것 같았다. 이날 공연에서 크리스티앙의 의상에 뭐가 걸렸는지 움직임이 살짝 꼬였는데, 이로 인해 포옹이 아니라 백허그로 마지막 포즈가 끝나버린 실수가 있었다. 초연에서는 시라노의 편지를 크리스티앙이 건네 받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퇴장을 했는데, 재연에서는 무대 안쪽 중간에서 록산이 앞으로 걸어나오고 그를 사이에 둔 채 무대 안쪽으로 뛰어간다.
자연스럽게 검술을 연마하는 록산의 안뜰로 장면이 전환된다. 시낭송회에 참석하러 가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의 록산은 드기슈에게 검술 연습을 신청하는 등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글을 다 외웠냐는 시라노의 물음에, 더 이상 대장이 시키는 걸 못해먹겠다고 반발하는 크리스티앙의 태도가 그의 어리고 급한 성정을 강조한다. 결국 진심을 담은 말은 전혀 전하지 못한 크리스티앙이 절망적으로 노래한다. 만약 내가 말할 수 있다면. 초연과 다른 재연의 가사가 록산을 향한 원망을 담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발코니 위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답답해하는 록산의 모습이 재연에서는 표현되지 않는 점도 안타깝다.
절망하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명심해. 자넨 멍청하지 않아." 라고 말해주는 류라노. 그러나 다급한 마음에 크리스티앙은 점점 아무말을 일삼고, 결국 시라노가 그의 옷을 입고 달빛 아래 그늘로 나서게 된다. 영혼의 고백을 직접 제 입으로 전달하는 시라노. 혹여 다른 빛깔을 낼까봐, 고르고 고른 말들이 꽃다발처럼 시들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시라노. 안녕 내 사랑. 조심스럽게, 애틋하게, 다정하게, 아름답게 전하는 사랑 고백. 초연과는 다르게 "사랑해요, 록산" 하는 직접적인 고백의 대사가 추가되었다. 록산의 답가, 마침내 사랑이. 류라노는 친절하게 크리스티앙을 빛으로 인도하고, 본인 손으로 문을 열어 그를 록산에게 안내한다. 크리스티앙이 모자를 벗어 발코니의 록산을 향해 인사할 때, 시라노 역시 모자를 벗어 그에게 답하는 장면도 마음이 너무 아팠다. 회전무대 위에서 록산의 집이 움직이고, 시라노는 천천히 그 무대 위로 올라가며 노래한다.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잔인한 영광이로다, 내 말을 품은 입술에 나의 그녀가 입맞출 때. 제 입술에 손을 살풋 얹고서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그 키스를 날리는 시라노의 모습이 지독히도 쓸쓸하다.
드기슈의 편지와 이를 바꿔 읽는 록산의 재치. 넘버였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대사로 처리되었다. 드기슈의 목소리에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던 록산을 진정시키며, 시라노는 신부님에게 결혼식이 얼마나 걸릴지 차분히 묻는다. 다급하게 라그노의 빵봉투를 뒤적이던 시라노는 빵가면을 뒤집어 쓰고 왼쪽 무대 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달에서 떨어진 나. 달나라에서 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보다 강조하는, 자신 역시 이러고 싶지 않아 미쳐버리겠다는 절망을 뒤섞은, 혼란스럽고 아픈 감정이 섞여든 넘버. 일견 장난스러운 톤이지만 그 안에 절절한 울음이 녹아들어 있어서, 유쾌한 넘버임에도 고통스러운 시라노의 감정에 한층 몰입이 됐다. 초연에서는 귀엽고 혼미했던 이 넘버가, 재연에서는 조금 더 슬프고 애틋하다.
실연의 아픔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시라노는 애써 태연하게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결혼식이 끝났노라 선언한다. 상황을 파악한 드기슈는 이를 악물고 가스콘을 징집하는 복수를 이행한다. 첫날밤은 조금 미뤄야겠다는 초연의 대사가 없어져서 좋았다. 하지만 반주에 맞춰 칼 같은 동작으로 징집명령을 따르는 가스콘 부대원의 모습이 없어진 건 조금 아쉬웠다. 대신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록산이 무너지는 걸 부축해주는 시라노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그를 부탁해요. 그를 위해 방패가 되어달라는 록산의 부탁. 그 말에 시시각각 상처 입으면서도, 록산을 위해 그러겠노라 약속하는 시라노.
나 홀로. 모자를 내팽개치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의 외침. 무릎을 꿇은 채 "승리도 패배도 다 내 몫이니, 늘 그랬듯" 하는 울먹임과, "기꺼이" 하며 하늘을 노려보고 "맞서리라," 하고 짓씹듯 이를 악문 목소리, "홀로." 하며 흘러넘치던 원망과 고통을 단단히 끌어안는 묵직한 결심까지 드라마틱한 구성을 만들었다. "콧대를!!! 높이 치켜들고!" 하는 부분을 강조했고, "이슬 맞으며 잠을 자도 / 날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길이겠지" 하며 허망하게 무대 뒤쪽으로 걸어간다. "날 할퀴는 사랑도 전쟁과 운명도 난 두렵지 않아" 하는 류라노가 진심으로 고독해 보여서 함께 고통스러웠다. 새하얀 달에 집어삼켜지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에서는 데굴데굴 굴러온 노란 달이 시라노를 감싸 안으며 환하게 빛을 밝힌다. 마치 첫 넘버의 조명처럼, 너무 화려해서 오히려 스스로 가득 끌어안는 듯한 달의 색감이 초연과 다른 여운을 남긴다.
2막. 비장미가 한층 강조된 첫 넘버, 파리의 추억. "혀 끝에는 와인의 향기 / 어머니의 스튜와 바게뜨" 하던 초연의 가사가 재연에서는 "피가 되어 빨갛게 번지고" 로 바뀌면서, 비극적인 전쟁의 모습을 더욱 시적으로 표현했다. 과거 회상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던 초연과는 다르게, 전쟁터의 절망 위주로 진행되는 재연의 연출이 극의 몰입도를 훨씬 높였다. 붉은 치마를 입거나 꽃 파는 소녀로 표현되던 여성들은 일괄적으로 수녀로써 넘버 후반부에 등장한다. 회전무대를 통해 전투에 지쳐가는 병사들이 효과적으로 드러났다. 초연에서는 크리스티앙의 행방을 묻는 것으로 표현됐던 시라노의 걱정은, 이 넘버에서 직접 그에게 총을 겨누는 방법 등을 일러주는 형태로 재연의 이야기에 녹아들었다. 초연에는 없었던 낚시 장면이 재연에 추가됨으로써,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관계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죽음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무겁게 느껴지지. 그러다 어느새 부자연스러운 일부로 남게 되지. 내 코처럼." 하는 대사를 통해 시라노의 인격이 드러났고, "어디에 있든 삶은 전쟁터야" 라는 대사는 추후 록산의 말과 겹쳐지며 이야기의 개연성이 높아졌다. 재연 첫공 때 이 장면에서 류라노가 품 속의 편지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소소한 참사가 있었다.
직접 수레를 끌며 적진을 뚫고 온 록산의 재기발랄한 재치가 재연에서 한층 부각됐다. 초연에서 시라노를 먼저 발견한 뒤 크리스티앙을 발견하는 록산의 모습이 은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연에서 크리스티앙에게 달려가는 록산의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재연의 연출은, 록산이 대놓고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대사를 하게 만듦으로써 초연보다 직설적으로 시라노의 영혼을 향한 록산의 사랑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비유를 통해 깊이감 있는 연출을 곱씹게 만들었던 초연의 매력이 사라진 것은 아무래도 속상하긴 하다. 그러나 지난 후기에서 언급했듯, 재연의 연출 변화가 지닌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 방식을 비판하지 못하겠다. 영광을 향해. 초연에서는 시라노 및 가스콘 부대가 이끌어나간 넘버였는데, 재연에서는 록산이 직접 그들을 끌고 나간다. 전장을 뚫고 올 만큼 용기 있는 록산의 태도와 가스콘의 결심, 드기슈의 변화 등이 잘 드러나는 연출 변화여서 마음에 든다.
매일매일 편지를 썼음을 크리스티앙에게 고백하는 시라노. 이어지는 넘버, 하루 또 하루. 회전 무대를 사용하여 넘버의 연출이 다소 바뀌었지만, 초연의 애틋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 장의 종이 위에 전하는 마음.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당신이 오늘도 기다릴테니" 하는 초연의 가사가 "당신을 위해 난 편지를 써요" 하는 재연의 가사로 바뀌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록산과 마주하는 크리스티앙. 시라노와 똑같은 말을 하는 록산을 보며 현실을 마주한 그의 고통은 깊이를 더해간다. 오로지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고백에 크리스티앙은 무너져내린다.
초연의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넘버가 없어지고 새로운 넘버가 재연에서 생겼다. 결투하는 연출을 삽입하면서 보다 극적으로 표현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대립. 애 취급 좀 그만하라는 크리스티앙의 절규가 그의 성장과 절망을 여실히 표현했고,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말에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두 사람을 지키려드는 시라노의 의지가 숭고하여 아름다웠다. 총성과 함께 무너지는 크리스티앙과 그를 붙든 시라노. 록산이 사랑하는 건 자네라는 시라노의 거짓말에 크리스티앙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난 멍청해서 그렇게 말하면 믿고 싶다고. 멋있게 살고 싶었다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라노를 동경했던 크리스티앙은, 그의 품에서 '멍청하지 않았던' 제 삶을 회고하며, 사랑하는 이를 두 눈 가득 담고 마지막 고백을 하며 스러진다. 젊고 아름다운. 진심으로 크리스티앙을 아꼈기 때문에 시라노는 고통스러워 한다. 동시에 깨닫는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하지 못한 말을 절대 록산에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크리스티앙의 죽음과 개인적인 비극으로 고통 속에 침잠하는 시라노.
순앤가스콘. "아듀 록산!" 무대에 홀로 남아서 외쳤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의 시라노는 가스콘 부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친다. 절박한 상황에 뛰어드는 가스콘 부대가 조금 더 극적으로 표현되고, 정지한 그들의 한중간에서 시라노는 고통받는 얼굴로 운명과 마주한다. 초연에서는 외로이 서있던 시라노가 삼삼오오 모여있는 부대원들에게 다가가서 이를 악물고 격려했지만, 재연에서는 가스콘 부대가 똘똘 뭉쳐서 움직인다는 인상이 강했다. 재연에서는 화음을 쌓아간다는 느낌보다는 무대 한중간에서 절규하듯 가스콘을 부르짖는다. 회전무대가 돌아가면서 창이 꽂힌 가장자리 중간에 선 류라노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며 성호를 천천히 긋는다. 그대로 무대 중앙에 위치하게 된 시라노는, 가스콘 깃발과 록산의 손수건을 묶은 깃대를 바닥에 탁 내려치고는 몸을 확 숙인 채 "간다-" 하며 달려들듯 적진을 향해 뛰어드는 포즈를 취한다. 점차적으로 화음을 넣으며 "가스콘-" 하며 마지막 포즈를 취한 가스콘 부대는 그대로 정지한다. 그리고 천천히 회전무대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 마치 정지한 시계태엽을 거꾸로 돌리듯이. 그 실루엣 앞으로 양손에 초를 든 수녀들이 등장한다. 가을의 나날들.
15년 뒤. 재연에서는 크리스티앙의 추도일이라는 설정이 새로 생겼고, 초연의 계단이 없어졌다. 여전히 귀족에게 싸움을 걸고 다니는 시라노의 안위를, 귀족인 드기슈가 대체 왜 모르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라그노의 걱정에 록산은 시라노를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가 엄청 싫어할 거라고 말한다. 전반적인 대사는 초연과 비슷하게 구성되지만, 재연에서는 최고의 남자 넘버가 모든 인물이 퇴장하고 록산이 혼자 남았을 때 7시를 알리는 종이 다 울린 뒤에 진행된다. 첫공 때는 넘버 구성 때문에 다소 몰입이 떨어졌는데, 이날은 가사 하나하나가 시라노를 표현하는 문장들임이 여실히 드러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넘버 마지막 즈음에 무대 뒤편 오른쪽에서 시라노가 천천히 등장한다.
초연의 시라노는 낙엽을 보며 감상적인 말을 뱉는다. "아름다운 죽음이네요. 하늘에서 땅으로 여행하는 짧고 부드러운 비행" 이라고. 그러나 재연에서는 "아름다운 비행을 하네요. 땅 위에 닿는 순간 썩어가리란 걸 알면서도. 그 추락이 비상처럼 우아하길 바라는 거겠죠" 하며 자조적으로 말한다. 시라노의 신문. "지난 토요일 웬 시인이 왕 앞에서 던진 한 마디" 하며 권력을 비판한 이야기를 전하는 시라노의 말은, "지난 토요일 저녁식사 한 시간 전, 시라노 드 벨쥐락 씨께서 안타깝게도 살해당했습니다" 하는 자체 선고와 이어진다. 삶의 마지막까지 날카로운 펜 끝으로 모두를 두렵게 만들었던 시라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결말. 그의 죽음이 결코 초라하거나 평범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유일한 단서.
자신이 일평생 사랑해왔던 영혼이 다름 아닌 시라노였음을 알게 된 록산은 왜 말하지 않았냐며 고통스러워 한다. 시라노는 그런 록산에게 차마 키스하지 못한다. 대신 이마를 맞댄 채 비로소 공유하게 된 영혼의 교류를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아주, 잠시, 안녕. 이라고. 영혼의 쌍둥이와 다름 없었기에, 록산과 시라노는 죽음으로도 갈라 놓을 수 없는 교감을 나눈다. 동시에 시라노를 닮고 싶어 했던 크리스티앙과 시라노의 삶은 끝내 닮았다. 멋있게 살고 싶었다던 크리스티앙과 언제나 진실되길 바랐던 시라노는 모두 엉망진창인 결말을 마주했다. 그들이 지독히 사랑했던 록산의 품 안에서. 희망이 있을 때만 싸우는 게 아니라, 희망이 없을 때 싸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전사" 의 태도라는 선언. 이는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했던 초연과 구분된다. 거짓, 오만, 위선, 편견, 허영, 이 모든 것들과 맞서 싸우겠노라 이를 악문 채 절규하는 시라노의 단언. 달나라로 돌아갈 때 그가 가지고 갈 "티끌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그 영혼을 배웅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언어다. 황금빛으로 쏟아지는 단어들은 마치 시라노의 또다른 자아인 것처럼 무대 전체를 아우르며 쏟아진다.
연출적인 면에서 시라노 초연과 재연을 상세히 비교하고 싶었는데, 류라노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다소 담백한 후기글이 되어버렸다. 다음주에 봬요, 라고 멋대로 약속을 정해버려서 아무래도 일욜공에 가게 될 것 같다. 무대 위에서 반짝이며 존재하는 류배우님이 지나치게 눈부셔서, 가능한 한 많이 만나고 싶은 욕심이 생겨버렸다. 시라노 재연을 이렇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더욱 애틋한가 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처절한 시라노를 만나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 흘러넘치는 감정을 글로써 담아낼 수 없음이 원통스러울 따름이다. 후기를 더 자주 쓰면 류라노 노선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해석을 풀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류라노 곧 자셋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