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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2025.02.21 7시반
고은성 시라노, 이지수 록산, 임준혁 크리스티앙. 이하 원캐. 이율 드기슈, 최호중 르브레, 원종환 라그노. 고라노, 지수록산, 준혁티앙 세미막. 삼연 시라노 자둘자막.
며칠 전, 갑자기 류배우님을 향한 덕심이 차올랐다. 동시에 시라노를 향한 갈망도 치솟기 시작했다. 연시가 무척이나 바쁜 혐생에 다시 적응하느라 한동안 잊고 지냈던 욕망이다. 가뜩이나 자리를 구하기 힘든데 막공주가 겹쳐서 예매처는 야속한 0으로 가득하다. 꼬박 이틀을 고생한 끝에 2층 중블 1열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다. 토월 2층 1열에서 일테노레를 괜찮게 본 기억이 있기에 감지덕지하며 공연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정말로 만족스러웠다. 열심히 산책하던 총막을 굳이 챙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시즌 시라노는 딱 이걸로 자막하려 한다. 이제 2년 안에만 다시 돌아와 주면 된다. 그때는 필경 더 여유가 있으리라.
고은성 배우와는 연이 잘 닿지 않아서, 수년 전의 록호쇼 초연 브래드로만 만났더랬다. 일말의 걱정과 약간의 설렘을 안고 객석에 앉았으나, 고라노가 등장하는 순간 기우임을 깨닫는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능수능란하게 칼을 휘두르며 기품 있게 조롱하는 몸짓이 어찌나 맛깔난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무릎을 살짝 굽히는 귀족인사가 극 중 여러 차례 반복되는데, 그 고상한 자세에서 뚝뚝 묻어나는 조소가 짜릿한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노래를 워낙 잘하니, 넘버의 박자를 밀고 당기거나 대사투로 처리하는 부분도 굉장히 어울린다.
쌀라노가 숨길 수 없는 비범함으로 자연스럽게 대장까지 추대된 시라노 같았다면, 고라노는 어디서든 눈에 띄는 무모함으로 사람을 휘어잡으며 마땅하게 대장이 된 시라노 같았다. 경력직 쌀라노가 정석적인 시라노라면 고라노는 자유분방함에 방점을 찍은 시라노랄까. "영웅"적인 면모의 결이 달라서 재미있었다는 뜻이다. 고라노가 풍기는 좋은 의미의 날티가, 그의 노선과 딱 맞는다. 특히 '거인을 데려와' 넘버가, 완벽했다.
저항시를 썼다고 아이를 괴롭히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두르는 시라노. 분노에 차 파들대면서도 그들을 놓아주고 당장 나가라고 쫓아내는 시라노.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다정하게 괜찮냐 묻는 시라노. 너의 시에서 큰 영감을 얻었노라 말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시라노. 성치 않은 가스콘 부대를 향해 오늘은 해산이라 명령하는 시라노. 차곡차곡 채워 올린 분개와 신념, 결심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무대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찰나의 고라노는, 영웅 그 자체다.
"고결한 달빛이 되어 추운 밤을 밝히리라
날 아는 친구 미지의 운명이여 어서 오라
날 배신해도 지옥 끝에서 웃어주마"
오열에 가까운 눈물이 펑펑 쏟아진다. 영웅이 절실한 세상이라서? 곳곳에서 시대의 어둠을 뚫고 찬란히 빛을 발하는 영웅들이 고마워서? 그중의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죄책감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한 채 살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영웅을 지향하는 언어를 따라잡지 못하는 행동이 비겁해서? 사랑하고 동경하고 열망하는 시라노가 찬연하게 빛날수록, 북받치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내달린다.
오만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적들을, 거인을 데려오라!
세미막이라서 그런지 배우들의 디테일이 꽤나 많다. 고라노와 준혁티앙의 웃음포인트 티키타카도 찰떡같다. "안아주게" 라는 말에 자신을 끌어안은 크리스티앙의 목 뒤를 들고 있는 단도로 찌르고 싶어 하는 고라노의 디테일도 좋고. '썸원' 전 고백을 망설이는 록산에게 "당장 하세요" 라고 말하는 명령조나, 자신의 고백을 들으러 내려오겠다는 록산에게 제발 거기서 들어달라고 강한 어조의 반말을 하는 디테일도 신선하다. 나이차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세 사람의 관계성이 어딘가 새로웠달까. 배우 본체들의 비슷한 연령대가 시너지를 냈겠지.
휙휙 몸을 던지며 대원들 사이에 섞여드는 고라노가 마음에 든다. 대원들과 허물없는 어울리는 시라노가, 쌀라노는 큰 사촌형 같다면 고라노는 옆집 형 같다. 그래서인지 2막의 호형호제 장면이 자첫 관극 때보다는 덜 충격적이다. 그래도 다음 시즌엔 없어지길 바란다. '가스콘' 넘버 후반부에 드기슈한테 몰려가라고 휙휙 손짓하는 것도 잘 어울린다. 넘버 끝나고 <돈키호테>를 읽어보라는 드기슈의 말에 파들대는 목소리로 돈키호테를 모사하는 디테일도 진짜 좋았고! 그가 언젠가 분명 연기하게 될 맨오브라만차가 기대될 정도로 말이다.
고라노 좋았던 부분 하나만 더. '썸원' 넘버에서 "그이는 미소는 내 영혼을 위로해요" 라는 가사에 새하얀 이를 드러내던 고라노는 '거인을 데려와' 넘버에서 "웃어주마" 하며 손가락으로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너무 마음에 드는 디테일이다, 하고 넘겼는데, 마지막 장면 '안녕 내 사랑' 넘버에서 "그대 그 미소가 날 살게해요" 라며 살풋 입가에 미소를 걸어내는 고라노의 모습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덮친다. 영혼이 쏙 닮은 이 두 사람의 언어는 이토록 닮아 있었구나. 나를 위로하고 살게 만드는 그대의 미소. 이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수록산은 기대 그대로 잘하더라. 크리스티앙과 인사를 나눌 때 크리스티앙 드 뇌빌레트 "남작" 부분에서 말을 끊고 들어가는 것이 특히 좋았음. 웃음포인트도 잘 살리고. 가스콘맆 직전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장면에서 "두 팔과" 대사를 울먹이느라 뭉개는 건 일회성인지 디테일인지 모르겠으나, 불호 였다. 지수록산이나 고라노나 전반적으로 2막이 조금 아쉬웠다. 특히 마지막 장면. 지수록산의 감정은 과하게 내달리는데 고라노의 감정은 담백하게 뭉툭해서 몰입이 깨졌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거인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시라노의 처절한 고결함이, 영혼으로 와닿지 않았다.
가감 없이 말하자면, 배우보다는 연출 탓이 더 크다. 죽음 앞에 선 시라노가 지금껏 그대를 향한 사랑을 너무나 고백하고 싶었노라고 록산에게 직접적으로 고해하는 순간, 차오르던 감정이 산산조각 난다. 위대한 거인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미친 짓을 일삼으면서도 정작 제 사랑 앞에서는 비겁해지던 시라노의 인간적인 면모를 이렇게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다니. "나아가리 나아가리" 하고 픽, 허망하고 외롭게 쓰러지는 시라노의 죽음을 돌려내라. 홀로 꼿꼿한 시라노의 필연적인 고독함이, 삼연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삼연 자첫 관극 때는 초재연과 달라진 설정을 주워 담고 기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둘을 하니 세세한 차이가 눈과 귀에 밟힌다. '공연을 시작해' 넘버 하나하나라던가, '벨쥐락의 여름' 넘버에서 "나무에서 떨어지고" 가사가 "나쁜 놈들 혼내주고" 라고 바뀌었다거나, '마침내 사랑이' 넘버 전 시라노 고백 대사라던가. '완벽한 연인' 넘버에서 빠르게 편지를 배달하는 유모를 보며 문득 빵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초연의 유모가 생각났다. 커다란 찬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라그노네 빵집이었는데, 삼연에서는 부드러운 빵 하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궁핍한 시대의 직격타를 맞았구나.
'젊고 아름다운' 넘버에서 시라노 후반부 가사도 바뀌었고. 크리스티앙의 곁에 함께 묻힌다는 뉘앙스의 가사였는데, 너무 직설적인 표현에 순장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시라노가 맞은 칼을 휘두른 자가 "시종놈"이 아니라 "좀도둑"인 것도 바뀐 부분이고. "날 위해 울지 말라"는 대사 직전, "연극적"이라는 시라노의 표현 때문에 그 이후의 장면이 지나치게 연극적으로 보여서 속상했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 몰입이 되지 않아서 슬펐다.
'나 홀로 ' 넘버 직전 모자를 내팽개치지 않는 시라노라니. 우렁찬 고라노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귀를 사로잡지만, 위치가 무대 앞쪽이다 보니 극적인 느낌이 덜하다. '달떨나' 넘버 가사를 귀담아들어보니 시라노의 삶과 감정을 담아냈기에 자첫러의 입장에서는 이해도를 높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하지만 돌려내라, 초재연의 달떨나. 가스콘맆이 끝난 뒤 박제된 가스콘 부대가 서있는 회전 무대가 돌아가지 않는 것도 슬프다. 생생했던 전장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던 연출이었는데! 돌려내라!
그래도 마음에 드는 연출을 하나 찾았다! 1층에서는 인지하지 못했던 바닥 조명 연출.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넘버에서 시라노의 발아래에 초승달 모양의 빛이 생긴다. 그 뒤편으로는 록산과 크리스티앙의 다정한 실루엣 너머 보름달이 떠있다. 사진 위편처럼. '달떨나' 넘버에서 절망하는 시라노의 아래에 커다란 보름달 모양의 조명이 생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시라노의 발 아래 그믐달 모양이 나타난다. 차고 지는 달의 순리를 고스란히 따라가는 이 연출은, 1막 마지막 넘버 '얼론' 에서 정점을 찍는다. 사진 아래처럼, 다시 초승달 모양의 빛이 시라노의 아래를 밝힌다. 저물어 어둠에 삼켜졌으나 끝내 다시 차오르는 달. 마치 시라노 같지 않은가.
이 극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공연을 시작해' 넘버부터 줄줄 눈물을 쏟아내며 인정하고 말았다. 온 마음으로 사랑했던 류라노와는 별개로, 시라노라는 인물이, 이 이야기가, 음악과 대사와 무대가, 내 영혼을 울린다. 갈수록 살기 팍팍해지는 지구에서 계속 잘 살아가기 위해, 부당한 명령 앞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기 위해, 이 작품이 부디 꾸준히 주기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류정한 배우님, 이 극을 사랑해 주셔서, 아껴주셔서, 무대 위에 올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다시 만날 그때의 나는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하고 다짐하면서. 아듀, 시라노. 아주,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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