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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프롬어웨이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23.12.22 3시
 



남경주 닉/더그/덤, 서현철 클로드/시장, 최현주 다이앤/크리스털, 정영주 뷸라/들로리스, 신영숙 비벌리/아네트, 주민진 케빈T/가스/부시, 이정수 오즈/랍비, 김아영 한나/마지, 김지혜 보니/마사, 김승용 밥/무후무자, 김찬종 케빈J/알리/드와이트, 홍서영 재니스/승무원. 김주영/김영광 스윙.
 

 

라이센스 공연이 올라올 거라고 기대조차 안 했던 극이라서 꼭 챙겨보고 싶었다. 다만 쇼노트의 가격 패기와 공연장의 위치, 갑자기 생겨난 인터미션과 그에 대한 제작사 대표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차일피일 자첫을 미뤘다. 그러다가 쇼노트 할인이 생겼길래 잽싸게 예매했다. 마이크가 여러 차례 늦게 켜지고 서영재니스가 인원수 대사를 대차게 씹는 등의 소소한 실수들은 있었으나, 기대 이상으로 행복하고 즐겁게 관극하고 왔다.

 

 

"Welcome to the Rock"

 


2001년 9월 11일을 기억한다. 하루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버린 세상. 끔찍한 영상이 반복되던 TV 화면, 참담한 절망과 격양된 분노의 목소리들, 잿가루로 얼룩덜룩한 얼굴들 너머의 처참한 잔해들. 지구 반대편까지 실시간으로 전해진 참사의 짙고 묵직한 잔상은,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 있다. 그날의 고통은 뉴욕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이 극은 911 테러 당시 닫혀버린 미국 영공에 진입하지 못해 가까운 곳에 불시착한 비행기와 승객들, 그리고 그들을 받아준 이들의 실화를 담았다. 캐나다의 작은 섬 뉴펀들랜드의 갠더 마을이 그 배경이다. 38대의 비행기가 갠더 공항에 착륙했고, 약 7천 명의 사람들이 오갈 데 없이 발이 묶여 버렸다. 유래 없는 국가 비상사태로 정보는 엄중하게 제한되었다. 더군다나 휴대폰이 보편화되기 전이었기에, 하필 그 시점에 상공에 머물러있던 승객들은 한층 더 심각한 단절과 고립에 처했다.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기약 없이 기내에 갇혀 있는 답답함. 연고 하나 없는 생경한 마을에서 익숙한 물건 없이 머물러야 하는 불안함. 그리고 비로소 제공되는 폭력적인 진실. 승객들의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몰입도 높게 그려진다. 귀에 맴도는 음악은 매력적이고, 1인다역의 배우 역할들 역시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아쉬운 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과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점이 없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한다. 

 

 

"아 모르겠다"

 

 

연출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역시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참사의 순간들. 수많은 영상들이 남아있는 911 테러의 현장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화면을 통해 그 상황을 처음으로 마주한 이들의 표정만으로도 그들의 경악과 참담함이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뮤지컬 '타이타닉'의 결말에서 옷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한 연출 때문에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기에, 컴프롬의 이 연출이 당연하고도 감사했다.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날짜와 시간이 명확하게 고지된다. 무대 상단에 와이어로 달린 작은 LED 화면 다섯 개가 상황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하며 영상을 바꿔낸다. 비행기 창문, 공항의 전광판, 버스의 도착지 등의 이미지를 송출하며 시각적으로 이해를 돕는다. 다만 마트에서 구매한 상품의 광고를 보여주는 건 좀 별로였음. 무대 안쪽으로도 화면이 있어서, 심어진 나무 조형물과 거기에 달린 조명들을 한층 풍성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줬다. 인터미션 내내 조명들 구경하느라 바빴다.



인터미션은, 정말 왜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 처음 관극했을 때 느꼈던 것과 동일함. 2막의 시작을 1막 마지막 곡의 리프라이즈로 반복하는 구성은 정말 별로다. 이유 없이 극을 늘어지게 만들었다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근래 대극장 가격 때문에 말이 많아서, 인터미션을 삽입한 이유가 극의 길이를 늘이려는 편법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만했다. 평소 제작사가 쌓아온 업보가 더해진 탓도 있을 테고.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와 국적이 혼재된 이들이 사는 국가다. 등장인물들에게 각자의 특성을 최대한 부여하여 이 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점이 이 극의 큰 특징이다. 아예 극 중에 유대교, 힌두교, 기독교, 천주교 등등이 함께 노래하는 기도 넘버가 있기도 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 사회에서 무슬림들이 얼마나 배척과 경계를 받았는가도 표현된다. 다만, 무슬림 알리의 요리 도움을 거절하는 뷸라의 태도가 그저 사람 좋은 이의 거절이라고 느껴지게끔 만든 연출은 불호다.

 

 

1막 마지막 넘버 '스크리치 인(Screech In)' 넘버에서 무대 상수와 하수에 세워진 벽 구조물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다. 조건 없이 친절을 베푸는 다정한 갠더 마을 사람들에게, 승객들이 제 마음을 완전히 여는 순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이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땅에 발 붙이고 살라는 얘기

하늘에선 안 들려"

 

 

다양한 삶과 인물들이 담긴 작품이어서 여운이 길다. 참사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고. 로딩이 다 된 배우들 면면도 훌륭해서 만족스러웠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예상치 못한 캐럴메들리 앵콜 무대를 선물 받아서 더더욱 행복했다. 스윙 배우 두 분도 함께 해서 한층 유의미했고. 덕분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즐기며 벅찬 감정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부디 쇼노트가 현명하게 처신하여 막공 전까지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좋은 극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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