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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in 드림아트센터 3관, 2023.07.05 4시
박새힘 한스, 송영미 하일러, 전하영 루치우스 외 목소리, 박소리 교장 외 목소리.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으며 크게 감동받았던 경험은 없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억지로 <데미안>을 읽던 초등학생이 알을 깨고 나오는 새의 고통에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었겠는가. 고등학생쯤에야 다시 읽어보며 현학적인 문장들 사이에 숨겨진 데미안의 가치관과 싱클레어의 고민들을 짐작이나마 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 속에 담긴 앳된 학생들의 치열한 번뇌와 괴로움 또한 마음으로 와닿진 않았다.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갈등과 아픔이 있다는 공감은 되었으나, 헤르만 헤세의 문체와 표현이 나의 정서에 맞닿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극을 보러 간 이유는 단 하나다. 남성들이 주인공인 고전을 근간으로 하되, 극의 창작 단계부터 여성으로의 성별 전환을 전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남성 배우가 하던 역할을 여성 배우가 맡는 통상적인 젠더프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와 기대를 더했다. 근래 소극장극에 실망한 경험이 많았던지라 아예 마음을 비우고 객석에 앉았는데, 단 한순간도 지루함 없는 만족스러운 관극이었다. 아쉬움이 없진 않았으나, 수많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고전을 깔끔한 구성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익숙한 이야기와 흔한 연출을 여성 배우들로 마주하는 즐거움 또한 놓치지 않았고. 여배 비클래스를 관극 할 때 느낀 짙은 공감을 다시금 경험했다.
"내 세상을 궁금해하는 건 너밖에 없는 거 알아?"
"너도 이제 널 궁금해하잖아."
교복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맨 소녀. 가문을 일으키고 빛낼 아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소녀라니. 성별이 전혀 중요치 않은 세계관 속에서, 아이들은 웃고 슬퍼하고 대립하고 의지하며 온갖 감정들을 양껏 느끼고 경험한다. 달리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고 말리라는 기성세대의 억압과 담 너머의 자유를 꿈꾸는 청춘들의 우정은, 소년이든 소녀든 그 너머의 무엇이든 다름이 없다. 그 누구든 자기자신을 궁금하게 여기고 더 깊이 내면을 탐구할 자유이자 권리가 있다. 반짝인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손에 붙잡혀 통제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너의 세상에 주인공은 바로 너
그 자릴 빼앗기지 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해
그래도 돼"
극 시작 전의 형광 녹색빛 조명의 의미를, 극이 끝날 즈음에 깨닫게 된다. 수미쌍관의 구성도, 원작의 결말을 은유적으로만 드러내는 연출도, 과하지 않기에 여운이 깔끔하다. 감정을 쏟아낸 배우들의 반짝이는 얼굴도 아름답다. 겁 많고 소극적이던 새힘한스가 "까라고 해!" 라고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던 통쾌함과, 종이를 흩뿌리며 자유를 선언하는 영미하일러의 당당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멋진 배우들로 괜찮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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