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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in 샤롯데씨어터, 2023.07.23 7시

 

 

 

 

전동석 팬텀, 손지수 크리스틴, 황건하 라울, 이지영 칼롯타, 이하 원캐. 오유 라센 자첫. 동팬텀 자첫. 동손건.

 

 

오유 라센을 자첫했다. 드디어. 지난 2020년 내한공을 봤을 때부터, 아니 2018년 웨버옹콘의 라민팬텀을 봤을 때부터, 아니 애초에 2015년 6월 2일 팬텀으로 연뮤에 입덕한 그 순간부터 갈망하던 오유 라센공을, 마침내 만났다. 바라고 기도했던 류정한 팬텀이 없어서 다소 많이 절망적이었으나, 그럼에도 오유라는 극을 사랑하기에 애써 섭섭함과 쓸쓸함을 삼켰다. 

 

 

"노래해 나의 음악의 천사여

날 위해 노래해"

 

 

원래 계획은 6월쯤 부산에 가는 것이었다. 지은지 얼마 안 된 공연장이기도 했고 사이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홍콩/마카오 여행을 가게 되었고,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취소했었다. 그리고 샤롯데 객석에 앉자마자 그 선택을 후회했다. 돈이고 체력이고 뭐고, 드씨 갈걸.

 

 

샤롯데 무대는 너어무 작았다. 20년 옫이 드큘 삼연 때 세종과 예당을 거쳐온 무대구조물을 샤롯데에 잘라 구겨 넣었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이번 오유 라센 무대는 20년 오유 내한 블퀘 무대를 미니어처로 줄여서 꽉 채워 넣은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웅장함이 몹시 부족했다. 샹들리에 만으로도 꽉 차서 답답한 무대에 시작부터 불안했고, 이 아쉬움은 POTO 지하 다리가 고작 하나뿐인 것을 보고 정점을 찍었다. 고해하자면 그 장면에서 마스크 아래로 헛웃음을 뱉었다. 이토록 작고 좁은 유령의 지하세계라니. 이런 옹졸함은 엠개 팬텀으로 충분하다고! 

 

 

지나치게 덜컹이고 흔들리는 무대 구조물 역시 엠개 팬텀의 트라우마를 자극시켰다. 뮤옵나 부르기 직전, 유령이 깃털펜을 들고 미친 듯이 악보를 휘갈기는데 그 동작에 맞춰 악보대와 건반이 놓인 무대가 같이 덜컹덜컹 움직여서 불안했다. 이 외에도 흔들거리는 구조물이 꽤나 많았고. 샹들리에만큼은 튼튼하게, 안전 또 안전을 추구했으리라 믿지만. 첫 장면 한니발 코끼리도 엄청 쪼그매... 지하감옥 촛대도 너무 부족해...

 

 

 

 

오해하지 마시라. 샤롯데 좋아함. 사랑하는 수많은 극들을 이 '뮤지컬 전용' 극장에서 만났음. 다만 <오페라의 유령>을 담기엔 샤롯데 무대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는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의외로 음향은 나쁘지 않았다. 가사들 전반적으로 잘 들렸고, 5중창도 어느 정도 들렸다. 7중창이야 뭐, 가사보다는 화음 듣는 구간 아닌가요. 음향이 나쁘지 않은 바람에 AR 립싱크 구간이 분명하게 식별 가능하더라. 선명하고 명징한 동팬텀의 녹음 목소리. 오유 특유 연출인 객석 뒤쪽과 옆쪽에서 팬텀 목소리가 들려올 때,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관객들의 반응이 새삼 귀여웠다.

 

 

중블 3-4열 관객 머리 바로 위를 스치는 샹들리에 외에도 특이한 연출이 하나 있었다. 다른 프로덕션에서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올아이맆에서 유령이 등장하는 천사상이 프로시니엄 무대 틀 위쪽에서 내려오더라!! 지난 내한공을 비롯한 원래 연출은, 올아이를 부른 크리스틴과 라울 너머 무대 중앙 안쪽의 천사상이 객석 쪽으로 덮치듯 나온다. 천사상이 위에서 내려오는 건 신기하긴 한데,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유령에게서 위압감이 덜 느껴져서 별로였다.

 

 

어차피 이들이 있는 장소는 오페라하우스의 '옥상'인데, 굳이 유령이 천사 코스프레를 하듯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필요가 있었을까. 직후에 샹들리에 떨어뜨리는 장면의 동선 이동 최소화를 위해서인가 싶기도 했다. 천사상이 다시 프로시니엄 틀에 고정되었을 때 거기서부터 무대 왼쪽까지 이동하는 미등이 얼핏 보였고, 곧 유령이 거기 나타나서 샹들리에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개인 취향의 문제 이긴 하지만, 보수적인 이 뮤덕은 이전 연출을 더 선호한다. 

 

 

"내가 준 노래가 날 배신하나"

 

 

내한공을 볼 때와는 다르게, 귀에 정확하게 내리 꽂히는 가사들도 관극을 한층 신선하게 만들었다. 잘 아는 극을 복습하며 다시 읽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유령의 오만과 변태스러움과 절망과 외로움이 더 절실하게 와닿았고, 크리스틴의 끌림과 혼란과 순수함과 분노와 용서가 더 생생하게 이해됐다. 크리스틴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칼롯타도, 극장의 경영난을 걱정하는 배금주의 극장주들도, 유령의 실체를 알고 있는 마담 지리도, 유령의 만행에 눈이 돌아가서 크리스틴을 미끼로 내모는 라울까지도 말이다.

 

 

 

 

"난 너의 음악의 천사

가까이 나에게 오라"

 

 

지하감옥에 처음 크리스틴을 데리고 내려왔을 때의 동팬텀은, '자신의' 노래를 완성시킬 완벽한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욕망하고 그에게 집착한다. 자신의 악보를 형형한 눈빛으로 소중하게 가리키며 노래하고, 뮤옵나에서도 밤의 노래이자 음악의 천사인 자기 자신을 강조하며 저를 믿으라 강요한다.

 

 

"달콤하게 감싸주는 음악

들어 믿어 비밀스런 노래

마음을 열어 모든 환상을 펼쳐

거역할 수 없는 너를 느껴봐

이 어둠의 힘 밤의 노래여"

 

 

자신을 바라보려는 크리스틴의 뺨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밀어낸 동팬텀은 뒷걸음질로 그에게서 멀어지다가, "밤의" 하며 오른손으로 제 가슴께를 가리키며 강조한다. 오페라의 유령인 본인이 이 지독한, 밤의 노래 그 자체라는 단호함. 뮤옵나의 이 디테일 하나로 동유령 노선이 딱 보였고, 이는 피날레까지 잘 이어졌다.

 

 

"날 원한다 내게 말해줘요

언제나 어디든 영원히

크리스틴, 바람은 그것..."

 

 

피날레에서 크리스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의 동팬텀은, 자신의 음악을 아는 그가 흉측한 외모 너머의 자신의 영혼까지 봐줄 수 있으리라 간절하게 믿고 바랐다. 육체적 관계의 사랑이 아니라, 끝없는 고독 속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유일한 존재로써 크리스틴을 붙잡으려 들었다. 그래서 크리스틴이 두 번째로 입을 맞추면서 자신의 끔찍한 오른편 얼굴을 쓰다듬어주자, 동팬텀은 턱을 파르르 떨며 비통한 울음이 섞인 미소를 입가에 가까스로 그려내고는 천천히 그를 떼어낸다. 어머니까지 저를 버리게 만든 끔찍한 외모를 탓하는 동안 제 영혼마저 추악하게 타락해 버렸음을 비로소 인지하면서. 

 

 

그 일그러진 영혼조차 끌어안겠노라는 크리스틴의 포용과 사랑을 고스란히 받았기에, 처음으로 흉측한 얼굴을 다정히 어루만지는 온기를 느꼈기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동팬텀은 끝내 선택한다. 촛불을 들어 라울을 속박하던 밧줄을 끊어버린 순간 제 결말을 절감한 그는, 괴로운 신음을 쏟아내며 비틀댄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부러 몸집을 부풀려 그들을 쫓아내는 유약한 유령. 홀로 남겨진 고독, 돌아온 크리스틴이 돌려주는 반지에 절망으로 돌변하는 기대와 희망. 그가 키스한 제 왼쪽 손등을 내려다보던 동팬텀은 울음 섞인 웃음을 토해내고는 그 손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마스커레이드

가면들의 무도회

마스커레이드

얼굴을 숨겨 널 찾을 수 없게"

 

 

이날의 동팬텀은,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에도 죽음을 택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파리 그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그리워하고 그의 다정한 온기를 갈망하며 홀로 음악을 끌어안고 살다가, 고독한 인생의 끝에서 울음 섞인 웃음을 입가에 걸어내며 그에게 잔인하기만 했던 세상에 작별을 고할 듯했다. 온전한 고독에 절망하기보다는, 추억을 소중히 감싸 쥐고 외로움을 버텨내리란 느낌이 드는 유령이었어.

 

 

 

 

"하지만 영혼을 채우는 목소리

신비로운 노랫소리는 내게

눈을 감고 영혼을 날게 해"

 

 

손크리는 오유 텍스트를 그대로 형상화한, 사랑스럽고 단호하며 따뜻한 크리스틴이었다. 아버지가 보내준 음악의 천사를 굳게 믿는 순수함과, 팬텀의 음악과 목소리에 현혹되었으나 결국 제 의지로 애정과 연민을 갖게 되는 다정함과,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오페라하우스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앳됨을 완벽하게 보여줬다. 올아이 시작 전에 라울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담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는, 다소 정신 나가있는 듯한 모습이 크리스틴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하나인데 그 부분도 아주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라울이 열성적으로 쏟아내는 사랑의 언어가 천천히 스며들어 마침내 현실을 응시하고 그를 바라보는 변화가 올아이 넘버에서 온전히 표현됐다.

 

 

지영칼롯타는 너무 잘해서 등장할 때마다 황송했다. 세상에, 유령 네 녀석은 귀가 대체 어디에 붙어있길래 지영칼롯타를 보고 그런 비난을 쏟아내는 거니.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맛깔나며 표정도 좋은 지영칼롯타를 보면서, 팬텀 초연 자첫 관극에서 신칼롯을 만났던 추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노래를 잘하지만 못하는 느낌을 줘야 하는 카를롯타가 얼마나 어려운 역인데, 유령 이 짜식.

 

 

 

 

전직 오유 유령 윤영석 배우의 앙드레와 전직 엠개 팬텀 극장주 이상준 배우의 피르맹이 선사하는 맛깔나고 안정적인 연기와 노래가 편안했다. 앙드레의 푼수와 피르맹의 시니컬함이 디테일 곳곳에 담겨 있어서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잘생긴 목소리의 건하라울은 힘 있는 발성으로 깔끔하게 장면들을 소화했다. 라울 역시 어려운 역할이나, 류라울 못사는 어느 라울을 봐도 영혼의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 부탁합니다.. 

 

 

믿고 보는 김아선 배우의 마담 지리도 역시 좋았고, 맥 지리 역의 조하린 배우도 기대 이상이었다. 팬텀싱어로 얼굴과 목소리를 먼저 익힌 박회림 배우의 피앙지도 유쾌했다. 발레걸을 비롯한 앙상블들도 군더더기 없었고. 오케가 조금 아쉬웠는데, 이렇게까지 감동이 전해지지 않았던 오유 오버츄어는 처음이었다는 말로 평을 갈음한다.

 

 

 

 

"그 모든 환상을 난 주었지

그 모든 비밀을"

 

 

파리라는 도시를 애정하는 것도 아니고, 오페라를 즐기는 관객도 아닌데,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사는 유령은 심장을 뛰게 만든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절망이자 어둡고 음산하지만 화려하고 찬란한 환상이, 나에게는 팬텀이라는 존재다. 처음으로 공연 예술의 찰나성과 일회성을 절감하고 또 사랑하게 만든 작품과 캐릭터 역시 팬텀이다. 첫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팬텀이라는 환상 앞에서 내 영혼은 언제까지나 공명하리라 믿는다.

 

 

뮤옵나 마지막 음을 얇고 길고 아름답게 이어가는 동팬텀의 가면 쓴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였다. 공간을 가르는 청명하고 유약하며 찬란한 그 음정과, 소중히 그 음을 내뱉는 동팬텀의 환상에 젖은 얼굴을, 한동안 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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