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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펀스

in 아트원씨어터 1관, 2022.12.24 7시

 

 

 

 

양소민 해롤드, 최유하 트릿, 최수진 필립.

 

 

연이 닿지 않아서 초재연을 다 놓친 극이어서 이번 시즌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보고 왔다. 재연에 이어 삼연에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한 데다가, 이번 시즌에는 여배 둘 남배 둘로 성비까지 완벽히 맞춰와서 고마웠다. "남성"의 이미지인 양복과 구두를 착용하고 소년이나 형이라는 호칭 등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마지막 장면의 대사 하나로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시대에 맞춰 생동하는 예술의 힘이지.

 

 

공연 시작 직전, 온전한 곳이 없는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하며 무대 제작팀이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생각했다.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스티커들과 지저분하게 늘어지고 찢어진 벽지, 살짝 가라앉은 천장, 칼집이 나있고 스펀지가 튀어나온 더러운 소파, 찬장에 잔뜩 올려둔 참치캔과 닥닥 긁어먹은 티가 여실히 보이는 거대한 마요네즈 병들,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맥주캔까지. 이렇게 더러운 집을 무대 위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스태프들이 직접 쓰레기를 치우고 가구를 바꾸고 심지어는 드릴로 이곳저곳을 고치며 공간을 멀끔하게 탈바꿈시키는 인터미션 활용 연출이 극의 일부로 다가왔다.

 

 

 

 

※스포있음※

 

 

의지할 어른을 만난 아이들의 혼란과 변화가 어찌나 가슴 아프고 눈부시던지. 이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안다며 얼굴을 반짝이는 숮필립이 "언젠간 이 지도도 필요 없겠죠?" 라고 해롤드에게 묻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을 깨뜨리고 더 나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는 아이. 그런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유하트릿.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벅찼기에 보호를 명목 삼아 폭력적으로 필립의 행동을 제약한 트릿의 죄책감이 억눌린 채 폭발한다. 그리하여 해롤드의 죽음을 마주한 두 아이의 공포와 경악과 당황이 날카롭다. 그 모습을 보며 연극 <자기 앞의 생> 모모가 연상됐다. 믿고 의지하던 어른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 슬픔과 상실을 마주하는 찰나가 어찌나 아득하던지.

 

 

"넌 그냥 격려가 필요했을 뿐이야. 그렇지?"

 

 

트릿을 "아가" 혹은 "앵벌이 소년" 이라 부르던 해롤드가 마지막 숨을 내뱉기 직전 그를 "딸" 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스쳐간 장면들에 대한 재해석의 깨달음이 쏟아진다. 욕을 입에 달고 살며 세상 모든 것을 한껏 경계하던 트릿의 날카로운 폭력성이 일순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트릿을 향한 필립의 부름도, 멀끔하게 차려입은 채 빠르고 계산적인 자본주의의 이념을 이용하는 헤롤드의 상처도 새롭게 해석된다. 배우의 성별에 따른 단어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 극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커튼콜 인사를 하는 세 배우의 모습에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여운이 무척 긴 작품이다.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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