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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버러지
in 드림아트센터 4관, 2022.12.07 8시
오정택 올리, 최미소 질, 정다희 미스디.
덕질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분노를 야기하는 대상이 있다. 동시에 덕질을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의 일부 요소를 기껍게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늘 그렇듯 세상은 흑과 백으로만 나뉘지 않는다. 일을 못하는 회사는 소비자의 비판을 받아 마땅하나, 그럼에도 예술의 본질을 잊지 않는 제작사는 덕후로서 결코 비난할 수만은 없다. 달컴이 나에게 그런 존재다. 그들의 일처리에 못마땅한 기억이 없지 않으나, 그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만날 수 없었을 좋은 작품들에 대한 고마움이 늘 앞선다. 그렇기에 여력이 되자마자 달컴 극을 실결하고 즐겁게 객석에 앉았다.
블랙코미디는 꽤나 어려운 장르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웃음에 초점을 맞추다가 비하와 혐오라는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우를 범할 때가 많고, 풍자에 몰입하다가 청자의 공감과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극만 홀로 내달리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모 아니면 도가 많은 이 장르에서, <빛나는 버러지>는 모나지 않은 유머와 관객과의 적당한 거리 유지를 통해 적절한 균형감을 선보인다. 재미있는데 불편하고, 이해가 되기에 소름이 끼치는 아이러니가 블랙코미디 특유의 매력을 한껏 살린다. 무대와 객석 사이 제4의 벽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구성이, 관객으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집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고민하게 만든다. 미스디의 편지를 받은 게 나였다면? 올리와 질과는 다른 선택으로, 다른 결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평범한 얼굴 너머 태연한 잔인함이 기괴한 괴리감을 선사한다. 두 명의 배우가 오로지 연기만으로 겹겹이 쌓아가는 클라이막스 장면의 점층적 연출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품이나 구조물 하나 없는 여백의 무대를, 뜨겁고 답답한 햇빛이 점점 숨통을 조여오는 주택가 앞 야외 정원이란 공간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그늘막 없는 햇볕 아래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열기와 주체할 수 없는 어지러움에 휩싸여 결국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압도적이다. 잘 만든 텍스트와 잘하는 배우가 만나면 필연적으로 좋은 극이 나온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낀다. 막공 때는 보조석을 깔겠다는 미스디의 포부를 꼭 이뤄주고 싶은 극이다.
※스포있음※
가시적으로 손안에 들어오는 값비싼 물질과 이를 위한 반복되는 행위는 평범하게 착하던 인간을 무뎌지게 만든다. "레노베이션 인간"이라는 명명으로 자신과 그들을 구분 짓고, 생명체를 말 그대로 물화하며 무감각하게 욕심을 키워 간다. 옆집 쌍둥이가 힐난하는 동물 도축은 명백하게 질과 올리의 인간 도축을 꼬집는다. "이 완벽한 집의 일부가 될 수 있어 영광"이라는 케이의 말은 질이 듣고 싶었던 자기 위안의 환청처럼 들렸다. 끝내 부흥시킨 마을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거대한 쇼핑몰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욕망을 쏟아낸다. 벗어나지 못할 욕심의 수레바퀴에 모두를 가둬버리면서.
꿈의 집을 위한 이 모든 끔찍한 일은 전부 아들을 위해서라 말버릇처럼 합리화하던 질은, 더 많은 희생을 요하는 미래를 꿈꾸며 말한다. 그때가 되면 아들 둘이라는 일손이 함께 하지 않느냐며. 우리는 그 많은 시체를 충분히 옮기고 집을 레노베이션할 수 있노라고. 본말전도의 찰나를, 빛에 눈이 멀어버린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질과 올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미스디는, 전화번호를 남기는 대신 내가 필요하게 될 때 내가 연락하겠노라 말하는 그는, 악마겠지. "어린이 여러분" 이라는 호명은 길을 잃은 어린 양인 인간들을 은유하고. 극 중에서 아예 "어린 양"을 직접 입에 올리기도 하니 말이다. 마치 바른 길로 이끌어줄 것마냥 달콤한 말로 인간들을 현혹하지만, 자신은 그저 제안할 뿐 선택은 그대들의 것이라 유혹하지만, 그 길의 끝은 예정된 파멸이다. 기뻐하는 질과 올리를 배웅한 미스디는 제4의 벽 너머 관객에게 말한다. 그대들은 내 초대로 여기 앉아있는 거라고.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그걸 주겠다며 가방에서 새빨간 계약서 수십 장을 꺼낸 뒤, 뒤돌아 서서 무대 위에 종이를 흩뿌린다.
빛을 쏟아내며 죽어간 것은 무엇인가. 버러지 같은 삶이라 여겨진 목숨인가 혹은 목적을 잊고 욕심에만 사로잡힌 버러지의 인간성인가. 빛나는 버러지가 내뿜는 빛은 찬란한 천국을 가장한 끝없는 절망의 지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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