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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투모로우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2022.02.23 7시반
강필석 김옥균, 김재범 한정훈, 박영수 고종, 신재희 이완. 요정옥균, 범정훈, 슈종. 필범슈 페어막.
요범슈 페어막으로 초연을 자첫자막 했었던지라, 이왕이면 재연도 같은 페어의 페어막을 보기로 했다. (초연 후기) 초연 당시 국정농단으로 하수상한 시국이었기에 "갈 수 없는 나라"를 부르짖는 이야기가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5년이 지나 재연을 만나고 있는 지금 이 시국 또한 어지럽기 그지없어서 씁쓸하다. 내가 나로서 당당할 수 있는 조선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초연 후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초연 때 불호가 많았기에 재연은 패스할까 했으나, 극이 별로여도 믿고 보는 배우들이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확신을 안고 객석에 앉았다. 아쉽게도 1막은 전체적으로 너무 어수선해서,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초연 당시의 불호 요소들이 아련히 떠오를 정도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온갖 복합적인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2막은 정말 좋아서, 이 대단한 배우들이 이 누추한 극장에서 고생이 참 많다는 생각이 내내 들더라. 가사 전달도 제대로 되지 않는 극악한 울림의 음향을 가진 공연장의 존재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슈종 배우 본체가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게 보여서 철렁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와중에 본인의 역량을 발휘해 처절하고 애달프고 처연하며 절망적인 노선을 완성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 초연 때 좋았다고 기록했던 부분은 살짝 밋밋했으나,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완벽하게 취향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1막 모순 넘버 전후로 의자에 앉은 채 이완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에 흠칫 대고 파르르 떠는 연기가 고종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아가던 광기와 괴로움이 끝내 정훈의 이름을 부르짖고 계단 위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2막의 슈종이 어떻게 봐도 망국의 왕 그 자체여서 보는 것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참할 정도의 월광이 어찌나 시리게 마지막 빛을 내뿜던지.
"허한다. 허한다. 허한다. 허한다.
내 너를 믿는다.
그러니 내 마음이라도 가져가라."
"마음을 주셨다. 혁명이다"
초연 관극 당시 김옥균이라는 인물에 대한 미화가 강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사가 바뀐 건지 아니면 당시 듣지 못했던 부분들이 귀에 밟히는 건지 재연에서는 조금 더 거리를 둔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었음을 통감하고 다음 사람에게 제 실패를 지지대 삼아 더 멀리 나아가라는 유지를 남기는 김옥균의 고결함은 여전히 과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일본의 손을 빌리려던 이가 일본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며 쓰게 비웃는 고종의 대사 등이 갑신년의 삼일천하가 지닌 한계를 묵과하지 않고 짚어냈다. "실패한 혁명은 또 다른 혁명의 명분이자 동기가 된다"며 자신의 실패를 직시하는 요옥균의 꼿꼿함이, 혁명의 의의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이 그리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고 냉소하면서도, 개화파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다소 희망적인 어조로 "김옥균..!" 이라 중얼거리는 범정훈의 맑은 얼굴이 당대 힘 없는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것만 같았다. 족보를 팔아 가문과 성씨를 버렸음에도, 2막 첫장면에서 제 정체를 밝히며 "정훈입니다. 한정훈." 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 또한 김옥균에게는 온전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애틋했다.
초연 당시 홍종우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역사 왜곡 및 미화의 논란이 다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서인지 재연에서는 '한정훈'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홍종우'라는 실존 인물의 이름을 사칭한 것으로 내용을 바꿨더라. 관객에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시간을 되감는 연출을 초연에서도 극도로 싫어했었는데, 재연에서는 과거 회상 장면을 통해 한정훈이 김옥균에게 접근하기 위해 홍종우라는 이름을 빌린 것이었다는 설명을 더하며 한층 중요한 장면이 되었다. 이외에도 2막 마지막 장면 직전, 영화 촬영 시 사용하는 기법처럼 중간중간 슬로우모션을 취하며 정훈의 싸움을 보여주는 연출도 여전하더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어떤 행동으로 옮겼는지 흔적을 남겨서,
우리의 내일을 오늘로 살아갈 이들에게 또다른 힘이 될 수 있도록."
고종의 밀명을 받들어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며 끝까지 저항하던 정훈은, 우리의 노력이 일제의 침탈을 조금이나마 늦추지 않았느냐며 말한다. 지금 우리가 남긴 흔적이, 우리의 미래를 오늘 삼아 살아간 이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라고. Gone Tommorrow. 영영 가버렸기에 도달할 수 없는 내일을 꿈꾸는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비록 자신은 그 세상을 마주할 수 없을지라도,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얻으리라 굳게 믿으며, 멈추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갈구하며 걷고 또 싸운다.
이 장면에서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끝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으로 잠식되어 가던 아득한 조선이 비로소 보였다. 자신의 내일을 내던져 다른 이들의 오늘을 지키고자 했던 그 간절하고 명징한 별빛들 말이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그렇기에 우리 또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을 살며 내일을 그려가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기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이리라. 해가 뜨는 나라, 작은 조선의 현실을 알리고자 온몸을 내던졌건만 회의장에 입장하지도 못한 채 끝내 분사하고 말았던 헤이그 특사에게 전하고 싶다. 우리의 조국은 이제 전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노라고. 이 모든 자유와 평등은 전부 당신들의 눈물과 피와 목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노라고 말이다.
조선의 붕괴.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띈 채, 갑판 위에서 옥균과 함께 추었던 불란서의 춤을 추는 범종우의 디테일이 재연 관극의 가장 큰 이유였다. 희망이 없어보이는 시대에도 서로의 유지를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은 어찌나 비극적으로 아름다운지. 내가 나로서 당당할 수 있는 나라는 아직 도래하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혁명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정녕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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