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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in 유니플렉스 1관, 2021.09.24 7시반

 

 

 

 

임강희 아가사, 김재범 로이, 강은일 레이몬드, 임별 아치볼드, 최호승 폴, 김남호 뉴먼, 이아현 베스, 강인대 헤리츠, 정다예 낸시. 깡가사, 범로이.

 

 

14년 소가사 15년 대가사 이후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극이어서 궁금했는데, 김수로 프로젝트이자 압컨극이었다는 걸 미리 알고 갔다면 기대치가 분명 덜했으리라. 한국 창작 뮤지컬이, 특히 이 제작진들이 유난히도 사랑하는 "그 소재"는 대학로에서 영원히 사골처럼 우려먹겠지. 인물 등장 순간부터 직감한 이 반전이 그나마 덜 진부하고 덜 과하게 연출되었기에 다행히 불쾌함은 없었다. 지난 2017년, 스모크에 이어 인터뷰까지 관극 하며 체감했던 극강의 분노와 짜증과 현타보다는 훨씬 가볍고 옅은 농도의 찝찝함 정도에 그쳤다.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장면이 없지 않은, 재미있는데 재미가 없는, 훨씬 맛있게 우릴 수 있었을 텁텁하고 밍밍한 홍차를 마신 기분이었다.

 

 

 

 

"당신들은 살인이 재미있습니까?"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가 11일 간 실종되었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그의 내면에 집중한다. 살인 과정의 잔혹한 묘사보다는 평범한 사람이 왜 살인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동기"에 집중하는 작가는, 명성만큼 따라오는 비난과 편견에 괴로워한다. 힘없는 약자도 손에 쥘 수 있는 살인도구이기 때문에 "독"에 특별한 관심을 지니고 있다. 독의 이름과 효능을 언급하며 반짝거리는 눈빛 너머 꽁꽁 감춰온 욕망이 일순 번뜩인다.

 

 

실종 상태인 아가사가 로이와 함께 하는 동안, 아가사가 떠나온 저택에서는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을 의심하고 <미궁 속의 티타임>을 풀어내는 건 13살의 레이몬드인데, 이 인물에게 부여된 비중이 이렇게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유머 코드로 넣은 부분도 재미가 없고, 솔로 넘버들은 무대 위쪽 조명 연출을 구경할 정도로 너무 지루했다. 차라리 소년이 아니라 소녀였더라면 훨씬 흥미로운 캐릭터와 관계성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아가사 크리스티의 계보를 잇는 천재 여류작가의 슬럼프! 사실 그의 과거는 정말로 진득한 실타래처럼 아가사와 엮여 있었는데! 조수가 되고 싶다며 졸졸 따라다니는 옆집 꼬마에게 직접 수수께끼를 내며 챙기는 것도 훨씬 개연성 있었을 텐데.

 

 

"추리 소설을 쓴다는 건

거대한 미궁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

 

 

 

 

※스포있음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서 시작과 끝을 놓치지 않기 위한 붉은 실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레이몬드가 아가사에게 있어 붉은 실의 역할을 어떻게 해낸 것인지 그 서사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아가사는 이해는 해도 용서할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데 이 극의 허술함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붉은 실"에 걸맞는 붉은 톤을 활용한 연출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지 않은 이유도 모르겠다. 아가사의 내면에 깊이 감춰둔 폭력적인 살의이자 욕망을 상징하는 로이의 코트는 왜 흰색인가. 로이와 함께 왈츠를 추는 2막 초반 아가사의 로브는 왜 푸른 톤인가. 상상 속에서 마음껏 표출하는 욕망은 왜 독이 아니라 칼을 사용하는가. 상상에서 만큼은 권력을 손에 쥐고 싶었던 거라면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난 그냥 네가 좀 더 웃었으면 좋겠어.

젠 날 잊지 마."

 

 

번뜩이는 표정의 깡가사와 낮고 서늘한 목소리의 범로이가 나오는 모든 장면은 흥미로웠다. 이날 범로이의 노선이 이번 시즌의 평소 노선과는 완전히 달랐다고 하는데, 몹시도 취향이어서 마스크 아래로 배실배실 미소가 지어졌다. 김재범 배우가 노래할 때의 그 음색을 꽤 좋아하는데, 밀도 높은 공명감으로 채운 묵직한 소리가 냉랭하고 미스테리한 이날 노선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만족스러웠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외면하려는 아가사의 뒤에서 그의 양팔을 꽉 붙잡고 몸을 돌려 기어코 응시하게 만드는 범로이의 잔혹함이,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휩싸여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기필코 떨쳐내고야 마는 깡가사의 의지와 명확한 대비를 이뤘다. 평생 부정 당했고 끝내 배신 당했음에도, 마지막 순간 아가사의 뺨을 어루만지며 그저 네가 조금 더 웃길 바랐노라 속삭이는 범로이의 애처로운 고해가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나를 잊지 말아 달라며 떠나는 그 마지막 실루엣에서 미련이 뚝뚝 흐르는 것까지 좋았다.

 

 

 

 

앙상블 배우들 화음이 상당히 좋았는데 음향 때문에 극 초반 가사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은게 아쉬웠다. 매력적인 초저음의 별아치와 얄밉고 세속적인 기레기의 면모를 제대로 묘사한 호승폴이 특히 좋았다. 꿀노잼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극이라서 자둘의 욕망은 있으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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