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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투모로우
in 광림BBCH홀, 2016.11.03 8시 공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처한 게 아닌데 자괴감 들고 괴롭다. 휴가로 이 땅을 떠나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천지개벽 수준으로 이 나라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 이후 매일 같이 새로운 소식들이 쏟아지며 그 어떤 컨텐츠보다 뉴스가 가장 흥미진진한 격동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해서 간단하게라도 글을 좀 쓰고 싶었는데, 글의 시작과 맺음을 도저히 결정할 수가 없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참을 방치해둔 이 블로그에 어렵사리 새 글을 쓰게 된 건, 운 좋게 초대권이 당첨된 덕분이다.
강필석 김옥균, 김재범 홍종우, 박영수 고종, 임별 이완, 정하루 와다, 이시후 종윤. 요정옥균, 범종우, 슈종, 별완. 범요정 페어막. 곤투 초연 자첫자막.
예상했던 대로 극 자체가 취향은 아니었지만, 창작뮤지컬 그것도 초연 답게 생각하고 고민할 거리를 꽤 많이 던져준 작품이다. 특히 이 하수상한 시절에 잔인할 정도로 아프게 돌직구를 날리는 대사들이 많아서 절로 차오르는 눈물을 죄다 쏟아내고 왔다. 덕분에 아주 잠시 후련했지만, 변명 일색 뿐인 같잖은 담화에 다시 짜증과 분노가 차오른다. 염치가 있으면 쪽팔린 줄 알아야지. 하긴, 그런 거 원래 없었지.
※스포있음, 극에 대한 불호 주의※
극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상당히 많았는데, 막공주이기도 하고 불호 위주라서 간략하게만 하겠다. 요정옥균은 온화한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카리스마가 부드럽지만 강렬했다. 다만 캐릭터 자체에 과하다 싶은 미화 해석이 들어간 연출이 불편했다. 평소에 김옥균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 의중과 한계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고 있었는데, 이 극에서는 거의 국가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애국심으로만 똘똘 뭉친 사람으로 신격화(...) 해버려서 오히려 의아했다. 조선을 위해 노력하고 행동한 위인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캐릭터를 지나치게 '미화' 하는 '포장' 에 치중했다는 점은 비판하고 싶다. 김옥균을 친일파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외세를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결과론적으로는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흐름을 끌어내 버렸다. 의도야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혁명' 을 시도한 자는 필연적으로 결과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김옥균은 개혁과 개화라는 이름 하에 시도한 혁명에서 제대로 판단하고 예측하지 못했고, 그래서 사흘만에 실패하고 망명했다.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던 격변의 시대였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다소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결론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평가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했던 극인 것 같은데, 감정만 과했고 설명은 부족했다. 술에 취해 난동을 피우다가 왕을 걱정하며 언성을 높이고 고통스러워 하는 부분에서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대부 자제로 기득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추구했던 자가, 지나치게 선비 같았다. 고고하게 존경받는 선생님의 이미지가 김옥균과 괴리감이 있었다.
범종우는 그리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었는데, 2막 초반 갑판씬부터 감정선이 짙고 맹렬해졌다. 평소에는 이 노선이 아니라는 리뷰들을 읽고 상당히 당황했다. 이날 범종우는 제 야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김옥균 선생에 감화 받고 그의 유지에 따라 살다가 삶까지 마감하는 인물이었다. 김옥균과 홍종우가 서로의 사상을 공유하고 정을 나누며 관계가 깊어지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 극에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왕명을 받들어 그를 암살하기 위해 접근했던 종우가 변심한 부분에 대한 개연성은 매우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극의 전개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신뢰와 권한을 얻어내 뜻을 이어달라' 는 옥균의 유지를 받들어 외세에 저항하고 조선, 대한제국을 지켜내기 위한 종우의 저항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개연성이 없어도 충분히 감정선의 흐름은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범종우 노선이 제 야망을 위해 행동하는 캐릭터였다니 오히려 상상이 가지 않는다. 무려 고종을 제 손으로 쏜 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이완에게 덤벼들기 직전의 범종우 감정선이 정말 좋았다. 읊조리듯 김옥균에게 당신이 원하고 꿈꾸던 세상을 만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죄하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총을 들기에 설마 자살하나 했는데 손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갑판씬에서 했던 프랑스춤 인사를 하고 덜덜거리며 직각으로 손을 들어올리는 춤동작을 하다가 허탈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뒤로 홱 돌아 방아쇠를 당긴다. 이게 원래 하던 디테일이 아니었다니..... 두 캐릭터 간의 밀도 있는 관계성 덕분에, 커튼콜에서 인사 직전 요정옥균이 범종우의 손을 잡아준 것이 무척 따뜻했다.
슈종은 정말 뒹굴고 찌질하게 구는 연기를 너무 잘해줬는데, 문제는 이 캐릭터가 진짜 미친놈 같아서 감정몰입이 전혀 안됐다. 초반에 진행된 갑신정변 장면에서 급박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선도 전개도 무척 빠르게 전개됐는데, 그 부분에 가사와 대사가 거의 안들려서 '김옥균이 자신을 버렸다' 며 배신 당해 부들거리는 고종의 감정이 그저 뜬금 없기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뒤에서는 다양한 일을 꾸미면서도 앞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한심하게 구는 모습은 이해가 됐지만, 기본적으로 과하게 찌질한 모습이 내가 아는 역사적 인물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어서 어색했다. 역사를 재해석한 작품에 대해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편인데, 슈종이 워낙 연기를 잘해서 이런 새로운 캐릭터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썩 유쾌하거나 공감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한 장면. 헤이그특사의 배후로 자신의 이름을 내뱉은 슈종을 찾아온 범종우가 분노한다. 그런 범종우를 무대 앞으로 끌어내 그의 턱을 꽉 쥐고 관객석을 향해 얼굴을 고정시키며 내뱉는 대사. "저들은 누가 왕이고 누가 역적인지 모른다!" 대사톤과 억양, 감정선이 가히 완벽했다. 슈종 노래는 중간에 혀짧은 소리라고 해야하나, 묘하게 발음이 말리는 부분이 많아서 듣기 좀 불편했는데, 모든 넘버에서 다 그러는 건 아니라서 의아하다. 다른 극에서 한 번 더 봐야 하나. 아, 1막에서 슈종이랑 범종우랑 각각 다른 부분에서 넘버 소절 하나를 통으로 날려서 아쉬웠다.
Gone Tomorrow. 가버린 내일. 오지 않을 미래. 닿을 수 없는 꿈. 갈 수 없는 나라.
앙상블 군무가 엄청 좋았다. 춤 자체 동선 자체가 훌륭했다기 보다는, 단체로 움직이며 적재적소에 힘있는 동작이 펼쳐지며 극 자체를 단단하게 묶어내는 느낌이었다. 중앙에서 독무 느낌으로 확 튀는 남자 댄서분이 있었는데 춤선이 정말 멋드러졌다. 잃얼과 곤투, 두 극을 보고 나니 두루마기처럼 늘어지는 천을 덧댄 의상이 무용 춤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포인트를 준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다. 노래는 썩 취향은 아니었다. 한 박자에 가사 너무 많이 넣는 걸 안 좋아해서. 물론 김음감님 지휘는 사랑이어서 극 중간중간 시선을 빼앗기긴 했지만. 연출은 불호 쪽. 특히나 촌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김옥균에게 총을 겨눈 범종우가 자체적으로(....) 되감기를 하며 고종에게 명을 받는 과거로 돌아가는 장면은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그건 아닌 거 같아. 그리고 격투씬에서 부분부분 슬로우모션 넣으며 긴박감을 극대화시키려던 장면 역시 촌스러웠다. 범종우가 다 해치우는 일당백의 모습부터 과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그 연출까지 들어가니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했나 싶을 정도로 장면이 붕 떴다. 조명을 통해서 무대에 그림자 만드는 연출은 좋았다. 마치 그림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웠다.
범종우의 명대사가 많았지만, 그건 대사 자체가 촌철살인이었을 뿐 극의 스토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얻지 못해 실패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 주제에 '백성을 위해' 혹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라는 말을 쏟아낸다고 하더라고 공감이 될 리가 없다. 김옥균은, 그리고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지극히 '엘리트주의' 적인 생각으로 제도를 바꾸고 윗사람이 정직하면 국가가 바뀔 수 있다고 믿고 행동했다. 하지만 범종우가 김옥균의 사상에 대해 외치는 대사들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말들이었다. 근간에 '애국주의' 가 깔려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을지 모르나, 전혀 다른 맥락의 대사에 극 자체의 스토리가 뭉개지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개인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겁니까?"
"내 나라의 현실을 외면하고 살 수는 없는 겁니까?"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홍종우의 질문에 서글픈 미소를 띄우며 김옥균이 답한다. 죽기 전까지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우리는 국가를 위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고, 살 수밖에 없다고. 이 장면에서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 살아야한다는 애국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국가라는 틀 안에서 살아가는 만큼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놀랍게도 나는 이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헬조선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에 고되게 청춘을 보내고 있음에도,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하나씩 쌓아올려 만들어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미워하지만 사랑한다. 애증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고통스럽고 눈부신 감정인 만큼, 지금 무척 힘겹고 화가 나고 무기력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행동한다. 민중이 제 손으로 만들어낸 값진 결과물을 이미 역사가 증명한 바 있기에, 마냥 손을 놓고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간다. 역사에는 흐름이 있고, 국가에는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들이 있다. 국민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 현실을 외면하고 이 안에서 살 수 있는 개인은 없다. 그건 국민이 아니라 노예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 희망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행동하고 움직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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