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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피스

in 아트원씨어터 2관, 2021.12.08 8시

 

 

 

 

김여진 리비, 전성우 데클란.

 

 

초연을 놓쳐서 무척 아쉬웠기에 재연이 돌아오자마자 냉큼 관극을 하고 왔다. 이 연극은 타인의 인생을 극이라는 양식의 틀과 규칙에 맞춰 새로운 이야기로 가공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오만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한다. 온갖 실존 인물들을 파헤쳐 자극적인 불행포르노 위주의 창작뮤지컬을 쏟아내고 있는 근래의 공연 창작진들은 이 작품을 반드시 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단언한다. 아니, 비단 연뮤만이 아니라 불과 40년 밖에 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현대사를 왜곡하여 현실의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상처를 새로이 입히고 있는 <설강화> 따위의 드라마에 제작/투자/참여하는 모든 이들 또한 필히 이 극을 보고 반성해야만 한다.

 

 

극이라는 장르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규칙과 경향성에 대해 논하며 '서술자'로서 1막 첫 장면을 시작했던 리비는, 대상화하여 보여주던 인물에게 점차 동화되며 점차 이야기의 '화자'로서 녹아든다. 이야기 속 소년이라는 '등장인물'로서 말하고 움직이던 데클란은, 가공된 극 속으로 직접 뛰어들며 '화자'로서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인물 간의 위치가 역전되어 역할이 뒤섞이는 변화가 이야기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이는 관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 제4의 벽으로 분리된 안전한 객석에 앉아 지켜보던 입장에서 그 수동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공격을 받기에 이른다. 현실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비극과 아픔을 관음한 뒤 극장을 나서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며 안정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관객 또한 도덕적,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이다.

 

 

"이건 이제 내 이야기니까"

"내가 필요했잖아!"

 

 

목소리가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준다는 타자의 언어가 정말로 그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며 기어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에게 도리어 더 큰 폭력이 되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는가. 소수자들이 하고팠던 이야기가 아니라, '적당히 기분 좋아질 정도로 정치적이되 진짜로 뭔가를 행동하게 만들 정도로 자극적이지는 않은' 안전한 이야기로 변질시켜 버리진 않았는가. 극이 결말을 맺더라도 무대의 막이 내리더라도, 그 아래 현실의 삶은 끊김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혹여 외면하지 않았는가.

 

 

"이야기는 이어지고, 너저분하지만 그게 진짜니까."

 

 

'작가' 리비가 "나는 씁니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문장들을 쏟아낼 때마다, 그가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훔쳐온' 것과 다름 없는 삶을 여전히 살아내며 실재하는 '인간' 데클란이 크게 부르짖는다. 그 이야기가 아니라고. 나의 삶은 작가 혹은 관객인 그대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노라고.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기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리비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과 그 이야기 바깥에서 생동하는 데클란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낯설고 생경한 공간에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을, 데클란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리비를 통해 배우고 기억하여 달라진 그는 극장 또한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이라고 굳게 믿고 만다. 제 인생을 훔쳐 만든 이야기로부터 배제 당한 데클란의 당혹감과 망연함이 어찌나 생생하고 날카롭던지. 호의 이면의 기만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경계심이 점차 허물어지며 눈앞의 관심과 사랑을 더 갈구하고 마는 여물지 못한 소년을 늘보데클란이 몹시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조심스럽지만 친근하고 생동감 있게 균형을 유지하다가 순간순간 시혜성이 섞여드는 어른의 의도치 않은 기만을 여진리비가 지독히 현실적으로 풀어냈다.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암전."

 

 

언덕 위에 멀리 떨어져 서서 바라보는 에든버러의 불빛은 영롱하게 반짝인다. 동화처럼 혹은 엽서처럼. 하지만 그 빛 하나하나를 밝히고 있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단순히 아름답다는 수식어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있는가. 불빛이 전부 꺼지고 내려앉은 암전이, 정말로 이야기의 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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