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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05.06 7시반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김지현 알돈자, 정원영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세류반테스/류동키 자열하나. 류지현페어 자둘자막. 막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기에 알돈자 세 사람을 한 번씩 더 만나고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샤롯데에서의 페어첫공 이후로 세 달만에 지현돈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현돈자는 희망 없는 현실 속에 침잠할대로 침잠해버려 고요해진 물 같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선 "그건 천한 여종의 이름이나 아니면 몸종의 이름"이 아니냐는 돈키호테의 말에도 타격을 전혀 받지 않고 "그게 내 이름이라니까요" 하며 무심히 그를 밀치고 지나쳐버린다. 알돈자 넘버 가사 중 "아무 생각 없이" 하며 공허한 표정을 짓는데, 바로 그것이 똥구덩이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현돈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돈키호테의 미친 짓이, 그 눈부신 빛이, 더없이 잔인하다. 아무 생각 없이 고요히 순응하고 있던 수표면에 돌은 던져 파문을 일으킨 사람이니까. "내가 원하는 건," 이라고 운을 띄우는 류동키의 목소리에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아! 아, 아! 이제야 나오시네!" 하고 외치던 지현돈자는 "그대를 구하는 일이오" 라는 말을 듣고 얼어붙는다. 구원을 바란 적도, 희망을 꿈꾼 적도 없이 멈춰있던 그에게 멋대로 구원을 건네주려는 사람.
헛된 꿈을 꾸다 더 지독한 절망으로 굴러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현돈자는 돈키호테를 찾아온다. 원망보다 화가 앞서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기억 좀 해보라고 외치는 지현돈자의 노선이 이해가 됐다. 만남 하나로 모든 것을 달라져버리게 만든 자신의 기사님이기에. 침대씬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범벅인 얼굴로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지현돈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를 둘씨네아라 호명한다. 그리고선 제가 내뱉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허어, 하고 웃음을 토해내더니, 이내 생명력이 움트는 눈빛으로 굳건하고 단단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결코 돈키호테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의 결연한 의지가 강렬했다.
현생이 너무 바빠서 거의 한 달만에 만나는 류배우님은 역시 우아하고 단단하고 귀엽고 형형했다. 넘버 전체적으로 힘을 꾹꾹 눌러 담은 소리였는데, 특히 1막 임드의 힘 있는 마지막 소절이 좋았다. 창을 바닥에 쾅 찍고는 "마지막! 힘이 다 할 때까지" 하고 결연하게 노래하는 류동키가 어찌나 찬란하게 빛나던지. 이날 평소보다 "레이디"를 강조했는데, 증표를 받아온 산초에게 "레이디께서 받아주셨느냐?" 라고 물었고, 2막에서 "나의 레이디는 진정으로 축복받으신 분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덕분에 자신의 레이디만을 품고 살겠노라는 돈키호테의 신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 와중에 귀엽기는 또 엄청 귀여운 할배였다. 앞치마를 탁 펼치며 "시장허시죠" 하고 묻는 빅벨영주의 자세를 따라 하며 양다리와 팔을 벌린 채 "은근 시장합니다" 라고 답한다거나, 뻬드로를 찌른 뒤 창을 치켜든 채 휘청이며 "왜 뒤로 가냐" 하고 궁시렁거리는 거나, 무어인 씬 끝나고 무릎 꿇으며 양손으로 "잡았다!" 한 다음에 손에 다시 끼우면서 "내~ 소중한~ 장갑~~" 하고 멜로디를 붙이는 등등의 요소요소가 "야무지게 귀여"웠다. 거울의 기사를 향해 소중한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청한 뒤 인사를 하면서 "냐아" 하고 소리 내는 건 이날 처음 봤다.
세류반테스가 근래 몇 회차의 엔딩씬에서 "죽으러 가는" 느낌을 풍겼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이날은 이전에 봤던 것과 유사한 결이었다. 손을 들어 올리지 않은 채 "신이여 도우소서" 하고 담백하게 기도한 그가 무겁게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알돈자의 선창에 이어 신부님과 도지사까지 합류한 마지막 임드에 뒤를 돌아본 세류반테스는, 하나씩 얹히는 목소리들에 진정으로 놀란 기색을 풍긴다. 문이 열리고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이 생경한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응시하다가, 빛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다시 죄수들을 내려다보던 그가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선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이것이 제가 가야 할 길임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하며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을 그대로 들어 올리다가 객석 쪽으로 손바닥을 돌리며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하고 이어가는 커튼콜의 임드가 눈부셨다. 양팔을 가득 벌린 채 오케 반주에 맞춰 손목을 휘릭휘리릭 돌리다가 오른발을 왼발 뒤로 보내며 허리를 확 숙이는 우아한 귀족 인사도, 활짝 웃으며 객석에 헌사하는 손키스도, 두 눈 가득 담아보지만 사진이나 영상으로 박제되지 않아 그저 하염없이 아쉬울 따름이다. 옆동네 대극장은 스페셜 커튼콜도 한다는데, 2015년에는 가능했던 무대인사 촬영이 왜 2021년에는 불가능한지 모르겠어서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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