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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05.08 3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윤공주 알돈자, 정원영 산초, 서영주 도지사/여관주인. 류동키 자열둘, 류공주 자다섯/자막. 공주돈자 200회 공연! 햇살영주 페어막.

 

 

예정했던 전관이 취소되었는지 일반 예매로 풀린 덕분에 충무에서 공주돈자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고 보낼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주돈자의 200회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맹렬한 분노와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던 알돈자가 돈키호테로 인해 흔들리고 절망하며 끝내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매끄러웠다. 다 똑같아 넘버 마지막 소절에서 끝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나, 우물씬에서 침을 뱉고 돌아섰다가 "근데, 아씨," 하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게 무슨 뜻이에요?" 라고 묻는 떨리는 목소리 등이 알돈자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예전이라면 이날 공연으로 이번 시즌 자체막공을 해도 큰 아쉬움이 없을 만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날 세류반테스는 본공도 단단했고 커튼콜도 굳건했다. 맨오브라만차 넘버에서 "들어라!" 하는 명령조의 선포에 "비겁하고 악한 자"가 되기라도 한듯 순간 오싹했다. 2막에서 죄수가 끌려나간 뒤 상자 위에 주저앉을 때 평소에는 두려움과 경악에 덜덜 떠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날은 공포감 대신 그저 하염없이 무력해 보였다. 도지사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안정감을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는 것 같았다. 커튼콜의 임드 역시, 배우 본인이 향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꿈꾸며 꾹꾹 담아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세류반테스여서 그런지, 문득 그의 의상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됐다. 이 극에서 붉거나 노란 색감은 돈키호테라는 이상주의자를 상징하고, 푸른 색감은 까라스코라는 현실주의자를 상징한다. 그리고 까라스코에 동조하지만 키하나에 대한 측은지심을 지닌 신부님의 신부복처럼, 검은색은 그 사이의 중립점에 위치한다. 세르반테스의 옷은 위아래 모두 붉은 톤이지만, 의상을 구성하는 무늬가 검은색이고 바지 안쪽 허벅지는 검은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으며 신고 있는 부츠 또한 검은색이다. 이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이지만 "언제나 생을 직시" 하며 현실을 마주해온 세르반테스의 복합적인 면모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듯했다. 물론 검은색 부츠는 미적인 이유겠지만, 땅을 디디고 선 신발이 검은색이라는 점이 이상을 꿈꾸나 현실을 마냥 외면하지 못하는 지식인을 은유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늘 그랬듯 자잘한 애드립들이 사랑스러웠다. 맘브리노 넘버 마지막 즈음 무등을 타고 있는 날아온 천이 투구를 치고 가서 살짝 현웃이 터진 류동키, 빨래터에서 겨드랑이 슥슥 닦은 천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어우 진짜 나" 하는 공주돈자, 그걸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받고 나서 "우엑 진짜 나" 하는 햇산초, 책봉씬 이름작명 직전에 "왜이렇게 말이 많아" 하고 투덜대는 류동키의 말에 "아니 뭘 그렇게 궁시렁거리세요?" 하고 묻는 영주영주까지. 류동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기사님 잘생기셨네~ 젊을 때 좀 날리셨겠어요" 하니까 멈칫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충무에 올 때마다 책봉씬에서 새로운 걸 해주던 영주영주가 이날이 자막이었다니. "나쁜 관절의 기사 / 냐아의 기사" 라는 애드립이나 슬픈 수염의 기사 넘버에서 "이제 떠나세요 용감한 기사여" 하면서 류동키를 거의 내동댕이치듯 무대 바깥으로 밀어버리는 디테일을 매번 처음으로 볼 수 있어서 진정으로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시즌에는 영주동키도 꼭 만나볼 수 있길 바래본다.

 

 

 

 

세류반테스의 목소리로 시작하여 류동키의 목소리로 맺는 철야기도는 매번 영혼을 울린다. 알돈자가 등장하는 타이밍에 극의 화자에서 극중극의 주인공으로 되돌아오는데, 보통은 그 시점이 "사내들에게는 정정당당하고 여인들에게는 예의를 갖추겠나이다" 부분이다. 이날은 공주돈자가 조금 일찍 나와서 "오직 앞만 바라보겠나이다" 라는 문장을 젊고 청명한 세르반테스의 음성에서 나이들었지만 단단한 돈키호테의 음성까지 그라데이션으로 물들이는데, 그 극적 희열이 짜릿했다. 대부분의 대사와 넘버를 나이든 할배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해서 가끔 아쉽기도 하지만, 이런 류의 갭을 영리하게 활용해주는 배우이기에 연극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체감하곤 한다. 언젠가는 정극에서 연기력을 마음껏 뽐내는 류정한 배우님을 만날 수 있겠지.

 

 

끝이 얼마 남지 않아 섭섭하고, 차기작이 요원하여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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