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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오브라만차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21.05.16 2시
류정한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최수진 알돈자, 정원영 산초, 김대종 도지사/여관주인. 라만차 시즌 총막. 류동키/세류반테스 자열셋, 류수진 페어 자여섯.
무사히 총막까지 도달했다는 안도감과 이날이 지나면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을 끌어안은 채 객석에 앉았다. 마지막 공연답게 배우들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까지도 열과 성을 다해서 이 순간에 임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덕분에 짙은 아쉬움보다는 가벼운 시원섭섭함을 끌어안은 채 이번 시즌 최후의 무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막공에서는 늘 그러했듯, 정석적인 노선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세류반테스와 유쾌한 애드립을 선물하는 류동키 덕분에 즐거웠다. 나름 담담하던 평정심은 마지막 장면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우리 모두! 라만차의 기사입니다."
무대 위 죄수들을 하나씩 바라보던 세류반테스의 시선이 무대 너머 객석에 닿는다. 이 이야기를 함께 만들고 끌어안았던 이 공간의 모든 사람이, 라만차의 기사라는 선언. 시라노 초재연의 총막에서 "우리 모두의 영혼" 이라 명명했던 것과 동일한 질감의 목소리에, 기어코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라만차의 기사이자 돈키호테라는 위로와 용기가 어찌나 따뜻하고 눈부신지 못내 서럽고 벅차고 뭉클했다. 피날레의 임드가, 귀를 기울이고 손을 내밀어 참여하며 끝내 다 같이 만들어낸 미친 기사의 이야기를 향한 헌사가, 지독히 아름다웠다.
"난 오십 평생 사는 동안 언제나 생을 직시해왔소!"
"오십 평생" 이라는 문구가 원작에 있었다는 걸 이번 시즌에 처음 알게 됐는데, 바로 이 대사를 막공에서 해주실 줄은 상상도 못 해서 듣는 순간 머리 위에 굵은 느낌표가 파바박 떠올랐다. 200회 가까이 이 작품을, 이 인물을 연기해온 배우가, 극 중 세르반테스와 동일한 지천명의 나이에 도달하여 비로소 입에 올린 이 대사가 영혼을 울렸다. 세르반테스를 이해하고 돈키호테를 연기하며 "현실은 진실의 적"이라 믿고 자신의 꿈을 좇아 생을 살아내고 있는 배우 자신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류배우님이 얼마나 이 극을 사랑하는지 새삼 절감하며, 이번 시즌은 바로 이 대사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생각했다.
이외에도 2015년과는 다른 이번 시즌만의 추억이 있다. 첫공부터 막공까지 매번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청아하고 단단한 세류반테스의 목소리로 이행하던 철야기도. 샤롯데 공연 후반부터 "오직 그분만을 위해 행하며 / 그분만을 믿고 따르겠나이다" 라는 기존 대사를 "그분만을 품고 살겠나이다" 라고 바꾼 철야기도의 마지막 구절. 대전 공연부터 세류반의 목소리를 섞어내던 거울의 기사 장면. "신이여, 신이여 도우소서" 하며 하늘 위로 들어 올리는 왼손. 류배우님 본연의 목소리로 부르는 커튼콜의 이룰 수 없는 꿈까지. "비겁하고 악한 자들"을 꾸짖으며 스스로를 "라만차의 기사" 라고 선포하던 형형한 그 눈빛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하리라.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며 무대인사를 시작했지만, 이내 벅찬 감정에 말을 잇지 못하는 류정한 배우님의 모습에 본공 피날레를 보며 토해냈던 벅찬 마음을 채 추스르지도 못하고 다시 펑펑 눈물을 쏟았다. 2020년 12월 18일로 예정되어 있던 개막일이 계속 늦어지며 결국 해를 넘기고 2021년 2월에 첫 공연을 하게 되었고, 8개월 만에 마주한 류정한 배우님의 목소리에, 그토록 갈구했던 무대 위 세상에, 하염없이 오열을 쏟아냈던 그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 배우들과 관계자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득하고 절망스러웠을까. 샤롯데에서 한 달 간의 공연을 마치고, 예정된 대전공을 무사히 마무리하였으며, 다행스럽게도 충무에서 연장공이 이어졌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 무대와 객석 모두가 바짝 긴장했던 위험한 시기는 또다시 도래했다. 취소된 바로 그 회차의 티켓이 있었기에 강제로 표를 취소당하는 절망을 또다시 경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큰 문제없이 무사히 총막까지 도달할 수 있어 더없이 기쁘고 감사하다.
우여곡절 많았던 시즌이었기에 배우들 모두가 한 마디씩 전하는 무대인사에 담긴 감정 또한 무겁고 기껍고 고마웠다. 실내에서 세 시간 동안 마스크를 낀 채 관극을 해야 하는 관객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배우들의 인사가 너무나도 따뜻했고, 꿈을 꾸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공연이 빛나는 별처럼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도 감동적이었다. 희망을 갖고 공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어찌나 소중한지 모르겠다. 객석에서 함께 마지막 파이팅을 외칠 수 없었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다 함께 웃고 환호하고 외칠 수 있는 시대가 돌아오리라 믿는다.
세류반테스와 류동키를 다른 시즌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믿기에, 이 작별이 견딜만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찬란한 꿈과 희망을 건네주셔서 진정으로 감사하고 영광이었습니다! 무대 위 류배우님의 부재가 부디 길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 만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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