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취향존중/Book

2020 독서목록

누비` 2021. 1. 4. 21:30

01. 체공녀 강주룡 (2018) - 박서련

 

강주룡, 조선 최초로 체공 운동을 벌인 노동운동가. 격변의 시대 속에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낸 이 인물의 이야기가 몹시 생동감 넘친다. 평범한 여성이자 노동가인 동시에, 비범한 의지와 걸출한 행동력을 지닌 운동가이다. 당연하기에 요구해야만 하는 권리를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며 싸워본 사람. 두렵기도, 막막하기도 하지만, "제 온 열과 성을 다바쳐 파업에 참여하는 것이 삼이를 위한 길이고 옥이를 위하는 길이며 저 자신을 위한 길인 것 (p.179)" 임을 깨달았기에 주저함은 없다. 그래서 강주룡은 말한다. "내 동지, 내 동무, 나 자신을 위하여 죽고자 싸울 것입네다. (p.181)" 그리고 행한다. 결사를 각오하고 대중을 위하여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강주룡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기보다는, 필요한 싸움을 피하지 않고 굳건히 맞서는 사람이다. 아사 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 스스로를 삼켜 뒤집어지기를 상상하는 태도 등이 강주룡의 인간성을 적절히 드러낸다.

 

대의적인 측면 너머 개인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평범한 동지. 개개인의 목소리가 덩어리가 되는 순간의 힘과 장악력도 잘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게 보인다. 작고 우습다. 무엇에 그토로고 성이 났었는가도 잊힐 만큼 만사만물이 멀게 느껴진다. 다시 저 아래로 내려가면 나 또한 그렇게 작아지겠지. 다시 사소한 것에 화가 나가 사소한 일에 울고 웃겠지. (p.33)" 커다란 사회의 작은 개인이 커다란 변혁을 만든다. 이야기의 제목이자 클라이막스를 다룬 연출 또한 인상적이다. 실존인물의 연대기를 잘 짜인 판에 맞춰 흥미진진하게 엮어낸 매력적인 책이다.

 

 

02.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2016) - 이민경

 

줄곧 '남성'들에 의해 기록되고 기억되어진 역사의 너머에는 '여성'들이 실재하는 진정한 역사가 있다. "페미니즘의 성취는 이렇게나 쉽게 지워진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제대로 쌓이지 않는다. (p.25)" 지워지고 잊혀지며 과소평가된 여성의 삶과 업적은 '운 좋게' 발견되어 재조명받지 못하면 흔적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재조명을 받더라도 기득권은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되새기고 기념하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불편함을 직시하면서 같은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 나는 유구한 역사의 결과물이다. (p.136)"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이 모든 발걸음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이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절박한 마음을 공유하며 침묵을 깨뜨려 나가는 우리는 지워지기 십상인 승리를 꿋꿋이 이어갔다. 그것을 딛고 다음 승리를 만들었다. (...) 그들의 말은 길이 나기 전까지는 힘이 세지만 일단 하나의 길이 뚫린 후에 돌아보면 금세 우스울 뿐이다. (p.49)"

 

돌이켜보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인정하고 정의 내린 건 15년 2월이었다. (공식 선언) 메갈리아가 시작되기 직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직후. 중학생 때부터 이미 가까이 접하고 있던 페미니즘을 정체성의 일부라 호명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페미니즘을 온전히 논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자기 성찰이었고, 다른 하나는 특정 체제나 사상 아래에 편입되고 싶지 않은 치기 어린 저항이었다. 10여 년 만에 비로소 인정을 하게 된 계기는 극렬한 혐오와 위선적이고 소극적인 차별의 경험이었다. 메갈과 2016년 강남역 사건으로 인해 페미니즘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고, 2018년 미투로 이어지면서 사회적인 공감과 연대를 구축하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더는 참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비로소 자그맣게 들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고 있다. 이 모든 걸음들이 우리의 '계보'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계보를 알지 못한 채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 마치 한 번뿐인 듯 계속 이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움직임이었다. (p.162)"

 

 

03.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2016) - 이민경

 

강남역 살인사건은 한국 여성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분노가 비단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공유하는 계기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 사건을 통해 더 이상 숨죽일 수 없노라, 내 언어로 이야기를 하겠노라 다짐하고 실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불쾌함 혹은 두려움을 느끼며 지나갔던 경험들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입니다. (p.106)" 여성 혐오라는 단어는 비로소 공론화되었고, 일상에 이미 존재했던 혐오범죄는 비로소 사회적 논의 대상이 되었다.

 

언어 전공자인 저자는 페미니스트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사회 기득권의 헛소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다. 여성으로서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직관을 기반으로, 표현할 언어를 찾고 회화를 연습하도록 돕는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셀 수 없이 들었던 온갖 형태의 헛소리들이 책 속의 활자가 되어 객관성을 띄자, 더욱더 참기 어려운 불쾌함이 되어 자극을 준다. "누군가의 '사지를 휘두를 자유'를 위해 누군가가 맞아줄 필요 (p.20)" 는 없다.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 (p.82)" 이다. 더 이상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힘들다면 원하지 않는다면 대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외쳐야 한다. "여성의 목소리와 행동은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 다른 주체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p.87)" 다정한 대꾸로 기득권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각과 입장을 크게 논의하고, 다 함께 저항해야 우리의 목소리가 지닌 힘이 커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 혐오와 등가의 의미를 갖는 남성 혐오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p.119)" 고상하게 말해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니, '유용성'을 위해 미러링 하는 것이다. 기득권이 행하는 건 억압이고 폭력이지만, 약자가 행하는 건 저항이자 자기 방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해일이 밀려오는데 자신들을 못생겼다고 조롱하는 조개껍질에 찔려서 울고 있다. (p.117-8)" 라고 센스 있게 조롱한 패러디가 무척 매력적인 책이다.

 

 

04. 이상한 정상가족 (2017) - 김희경

 

정상가족이라는 미명 하에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 특히 '아동'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3년 전에 출간되었으나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특히 코로나로 인해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이들의 현실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시기이기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 속에서 위계적 질서를 걷어내고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타인과 공감하는 태도의 변화, 일상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p.12)"

 

세계 최초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한 스웨덴의 사례가 상세하게 제시되는데, 근간의 원칙은 "어린이를 부모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여 보호제도를 운영한다. (p.215)" 는 것이다. 법이 제정되고 실효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의 신체적 온전성과 안녕을 보호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사회적 합의 (p.214)" 가 온전하게 공유되었기에 부모의 체벌금지법이 유효할 수 있었다.

 

"자율적 개인이 열린 공동체 안에서 너무 몸을 조이지 않는 느슨한 연대를 맺고 살아가는 것 (p.264)" 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지점이다. 개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기본적인 인권에 대해서는 집단적인 해결책을 보장하는 것. 개인을 통제하고 간섭하는 권력이 아니라, 약자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하는 국가.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 대상이어야 한다. (p.57)" "공공이 개입하는 것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라 가족의 짐을 사회가 덜어주자는 것 (p.237)" 이다.

 

10월에 이 책을 읽은 뒤 '공공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합의가 필요한데, 그 계기가 또 다른 아이의 비극일까봐 걱정스럽다.' 라는 문장을 남겼다. 그래서 불과 며칠 전에 낱낱이 밝혀진 정인이의 고통과 상처가 더 아프고 죄스럽고 미안하다. 처참한 결과에 비통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때가 됐다. 또 다른 거대한 비극이 터져 나오기 전에, 아픔을 견뎌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줘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p.267)"

 

 

05.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2020) - 장영은

 

비천하다, 사소하다, 무의미하다. 수많은 폄훼에 짓눌려 기록되지 못했고 그리하여 기억되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이야기는, 그들이 직접 펜을 들어 쓰고 체제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우며 끝내 살아남았다. "사랑을 감추지 않았고, 혁명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깊은 시선으로 인간을 응시했다. (p.22, 마르그리트 뒤라스)" 안주하지 않고 포기하기를 거부하며 주어진 운명을 올곧게 마주하면서도 역사와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 본 여성들의 이야기.

 

"내일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인재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여성을 지지해야 한다. (p.111,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투쟁하고 연대하여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은 여전히 지난하고 험난하여 막막하지만, 함께 살아남기 위하여 포기할 수 없다. 글쓰기는 인간의 최소 존엄이며, 여성에게도 글쓰기의 권리가 있다.

 

"말하는 사람이 바뀌면 역사도 달라진다. (p.130, 마거릿 애트우드)" 그리하여 역사는 다시 쓰이고 신화는 다시 해석된다.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해 낸 볼트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p.122-3, 크리스타 볼프)" 재해석된 이야기는 비단 신선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며 끝내 세상을 바꾸는 근간이 된다.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래가 달라질 리 없다고 단정 짓는 '도덕적 피로'를 항상 경계했다. (p.31, 도리스 레싱)"

 

나의 글은 나의 무엇인가. 나의 글은 무엇을 담고 있고, 무엇을 지향하며, 무엇을 사랑하는가.

 

 

06. 헌법의 약속 (2014) - 에드윈 캐머런

 

現 남아프리카 공화국 헌법재판소 헌법재판관인 저자가, 헌법이 걸어온 역사를 생생하게 풀어내며 헌법의 가치와 그 과정 속에서 성취한 결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다양성 존중, 차별 금지, 인권. 수많은 이들이 이 가치를 위해 싸워왔고, 좌절하기도 성공하기도 하면서, 20년 전보다는 더 나아진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입헌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헌법의 진정한 가치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만 한다.

 

삼권분립에 따라 사법부는 예산편성이나 정책 등 행정부의 의무이자 권리에 대해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면 수정을 요구해야 한다. "사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산을 마련하는 방법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일이다. (p.243)" 이러한 판단들이 의료, 행정, 주택 정책 등에 영향을 미쳤고 긍정적으로 개선되었노라고 저자는 말한다. 개개인의 예외와 편의보다는, 원칙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사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수록, 우리는 헌법이 상상하고 있는 사회에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p.290)" 수십 년 전 아파르트헤이트 법이 존재했던 시기를, 에이즈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현실을, 저자는 직시한다. 직접 겪어온 일이었으니까. 동성애자이며 에이즈(HIV) 보균자인 그가 마주해온 차별이었으니까. "인종적 우월주의가 지배하던 아파르트헤이트 법체계를 전복하는데, 법체계 자체가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p.64)" 법이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에, 사람들은 법을 통해 저항했고 궁극적으로 '옳지 않은' 이 법에 저항했다. "법률 활동을 통한 저항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집행 속도를 늦추고 부정의를 완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법이 불의와 불평등이 아니라 정의와 평등을 수호하는 체계로 변화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p.85)"

 

 

07. 그렇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2019) - 김호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확실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 적합한 질문이 바로 좋은 질문이다. 자신만의 질문을 가져보라는 저자의 제안이 고민을 하게 만든다. "질문은 때론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것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p.47)"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목표는 구체적이고 (Specific), 목표 달성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고 (Measurable), 상위 목표와 잘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Aligned), 현실적으로 성취 가능하며 (Realistic), 시간이 정해져야 (Time-bound) 합니다. (p.93)" 라는 SMART 목표 설정 등, 저자의 컨설팅 경험을 사례로 들어 읽기도 쉽고 공감도 편했다. '그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 '여류작가'라는 호칭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사례 등이 저자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질문의 프레임(frame)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 상대방의 반응이 180도 다를 수 있다 (p.21)" 는 것을 기억하고, 좋은 질문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조심해야겠다.

 

 

08. 기획자의 습관 (2018) - 최장순

 

세상을 익숙한 듯 낯설게 마주해야 하는 기획자의 자세를 잘 풀어낸 책이다. 특히 초반에 언급한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내용이 좋았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일상은 하루하루가 동일하고, 쳇바퀴처럼 그 똑같은 시간에 모두가 종속되어 있으나, 그 반복에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하여 차이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내일의 가장자리를 넘어 내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표현이 자극을 준다. "세상은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은 감상하고, 이해하고, 숨은 무언가를 파악하기 위한 대상이다. 기획자에게 세상은 언제나 익숙하면서 낯설다. (p.232)" 관찰하여 기록하고, 독서와 공부를 통해 사유하며, 그로 인한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기획이다. "진짜 내 지식이 되려면, '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 기획의 절반은 '학습'이지만, 학습을 완성시키고 오래 유지시키는 또 다른 절반은 '표현'임을 잊지 말자. (p.206)"

 

기획이란, "기호(Sign)들을 이해하고, 의미를 공부하고, 그 의미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때는 과감히 해체하여 재구축하는 과정 (p.12)" 이다.

 

 

09. 여행의 이유 (2019) - 김영하

 

여행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이 무척 와닿았다. 인생의 수많은 경험들은 그 경험을 하기 전과 후의 '나'를 완전히 다른 이로 구분 짓는데, 여행이라는 행위야말로 가장 극적이고 자극적인 '경험'이다. 타인의 여행기를 읽고 견문록 형태의 영상이 쏟아지는 시대이기에, 여행은 직접 경험뿐만이 아니라 간접경험으로서의 영향력도 지니게 되었다는 분석도 흥미로웠다.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p.117)" 경험이 언어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생각이 비로소 유통된다는 해석은, 작가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기대와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p.51)" 제 행동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마저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정의 내리는 것은 소설가의 특성인가 글쟁이의 습관인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소설을 언급하며, 여행이 끝난 뒤 돌아갈 거취를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곳 (p.132)" 이라 비유하는 것도 신선했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p.203)" 일상의 부재가 가능했던 시대가 지독히 그립다.

 

 

10. 세계의 리더들은 왜 철학을 공부하는가 (2019) - 리우스

 

AI를 활용하여 직접 대학 강단에 선 과거의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강연한다는 컨셉의 철학책.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루소, 쇼펜하우어, 니체, 샤르트르 등의 여러 철학자를 다루지만, 전반적으로 수박겉핥기 수준이다. 얕은 내용과 마무리 없는 결말까지 더해보니, 제목이 너무 과한 책이었다.

 

 

11. 너무 한낮의 연애 (2016) - 김금희

 

무기력, 나른함, 일상적이지도 정열적이지도 않은 초탈함. 단편소설들의 화자는 대부분 중심에서 빗겨나있다. 뭔가 이상하고 옳지 않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으나, 별다른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애매하고 어중간한 위치에서 화자는 타인을 '관조한다'. 관조당하는 대상 역시 크게 특별하지 않다. 무언가 '정상적인' 사람들과 핀트가 조금 다른,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해를 끼치는 건 아니기에 완전히 외면해버리기는 애매한, 그런 '비정상'에 가까운 존재들. "시선은 일방이어야 하지 교환되면 안되었다. 교환되면 무언가가 남으니까 남은 자리에는 뭔가가 생기니까, 자라나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무게감을 지니고 실제가 되니까. (p.28, <너무 한낮의 연애>)" 라고 거리를 두면서도 끝내는 깨닫는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p.42, <너무 한낮의 연애>)" 무던하고 담백한 작가의 필체가 지나친 몰입이나 과한 감정적 동요를 깔끔하게 제지한다. 현대인과 같은 건조함을 닮았지만, 동시에 서정적인 달큰함을 지녔다. "밤은 오고 잠은 가고 곁에는 침묵뿐이고 머릿속은 시끄럽고 그러면서도 뭐 또렷하게 어떤 생각은 할 수 없어서 그냥 나 자신이 깡통처럼 텅 빈 채 살랑바람에도 요란하게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 (p.89-90, <세실리아>)"

 

'취향존중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 독서목록  (0) 2022.02.07
2019 독서목록  (0) 2020.08.01
2018 독서목록  (0) 2018.12.30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2017)  (0) 2018.02.19
2017 독서목록  (0) 2017.12.31
공지사항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