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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주절/Deeply

페미니스트

누비` 2015. 2. 18. 07:51

"언제까지 일할 생각이에요?"

 

 

출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받게 된 질문에 잠시 당황하여 네? 하고 되묻자, 조금 더 자세한 사례를 담은 물음이 되돌아왔다. 보통 결혼을 한다거나 아이를 가진다거나 하면 일을 그만두지 않냐고. 여자는 그런 걸 미리 생각해두고 일을 시작하지 않느냐고. 애써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표정을 가다듬고 웃으며 답했다. 저는 결혼할 생각 없는데요? 하고. 금세 이야기는 다른 화두로 넘어갔지만, 망연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같이 일을 하게 된 선배들은 아주 좋은 분들이다. 이토록 괜찮은 분위기의 괜찮은 직장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말이 백퍼센트 진심일 정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에서 전해져 오는 사회제도의 차별적 발언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회식하며 술을 마시면서도 '일단 이건 차별이 아니고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라고 전제를 깔아놓고, '그래도 이게 현실이잖아?' 라는 투로 이어지는 문장들에 속이 끓는다. 무엇보다도 직장 내의 '좋은 분위기'를 위해서 신입답게 입 꾹 다물고 그 발언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스스로의 행태에 가장 화가 난다.

 

 

여기에 최근 이어지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숱한 모욕들. 학생 때부터 여성학 강좌를 들어오면서, 강의를 하시는 분들의 열정과 세련미, 박학다식함에 자주 압도되곤 했다. 그래서 얕은 지식과 얇은 인식을 겨우 가진 나로서는 함부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해서는 안되겠다는 반성과 고민만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나 자신'을 어느 집단이나 '~주의자'에 굳이 소속시켜 그 틀 안에 규정지어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크긴 했다. 페미니즘도 결국 하나의 사상이자 이념인데다가, 수없이 다양한 분파로 갈라져 각기 다른 양상과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갈림길들 중 딱 하나를 택하기가 아주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많은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 역시 "사회적 약자에 관심은 있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야." 라며 분란의 여지에서 항상 도망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해야 할 시점이 된 게 아닌가 싶다.

 

 

다 죽어서 스러져 가는 고독하고 괴로운 역사를 지닌 한국 페미니즘을 소생시키겠다는 목적이 아닌, 나 자신이 굳게 믿고 지향하는 '옳음'을 위해서.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 를 대변하며 싸우는 페미니즘을 내가 지닌 수많은 정체성들 중 하나로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올바름이 아닐까.

 

 

그러므로, 너무나 부족하여 부끄럽기만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페미니스트' 임을 단호하게 인정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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