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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존중/Book

2019 독서목록

누비` 2020. 8. 1. 09:58

01. 소년이 온다 (2017) - 한강

 

광주. 전쟁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했던, 일방적인 학살. 피 흘리며 쟁취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그 자체인, 80년 5월의 광주. 믿고 싶지 않은 역사를 잘 알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작가의 비유와 우회적 서술을 거치며 불시에 툭 터진다.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응시하며 죽음을 곁에 두는 아이. 죽음을 마주하고 죽음에 흩어지는 아이. 남겨진 채 죽음을 기억하고 곱씹는 아이. "죽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둔감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더 두려웠다. (p.89)" 살아남는 것이, 홀로 삶을 유지한다는 것이 더 고통스럽지만, 죽음 앞에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지독히 평범하고 위대한 인간. 검열로 검게 칠해진 희곡은 무대에 오른다. 무언극처럼 입모양으로 대사를 읊는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p.99)"

 

일렁이는 양초의 불꽃은 혼이며, 영혼의 시선이며, 어디서나 타고 있는 "사원의 불빛"으로 영영 꺼지지 않은 채 날마다 존재한다.

 

 

02. 리스본행 야간열차 (2004) - 파스칼 메르시어

 

자로 잰 듯한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던 고문학 교수 문두스가, 작은 파문을 일으킨 단어 "포르투게스" 하나 때문에 책방을 찾는다. <언어의 연금술사> 라는 독립출판물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갑자기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향한다. 새로운 언어로 낯선, 그러나 본인 인생을 반추할만한 묵직한 물음을 담은 문장들을 곱씹듯 읽어내리면서. 고작 5주. 심지어 중간에 도망치듯 고향 베른으로 돌아오기까지 한 짧은 기간 동안, 그레고리우스는 제 인생을 바꾼 책의 저자 아마데우 이나시오 프라두의 삶을 하나씩 따라간다. 그의 가족, 친구, 연인, 동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사진을 담는다. "과거가 그의 시선 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p.565)"

 

프라두는,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똑똑한 아이가 적절한 훈육을 받지 못해 왜곡되고 절망하는 실패한 교육의 예시다. 프라두는 커가면서 이를 깨닫지만, 영혼에 새겨진 방식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언어와 글을 통해 해소하고 발산한다. 신을 부정하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실존적 고민들을 지치지도 않고 던진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릴 적 도전하지 못하고 안주하고 도피했던 상흔이 있다. "낯설음이 이제 습관이 되었다는 생각 (p.306)" 을 하며 더 이상 과거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통감한다. 책을 읽으며 지금 이 순간의 내 고민을 성찰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p.570)"

 

 

03. 자기 앞의 생 (1975) - 에밀 아자르 (로맹 가리)

 

화자가 아이이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사회의 부조리, 불의, 악습을 비판할 수 있다. 가령 아이의 관점에서조차 이해되지 않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 같은 것들 말이다. 아이가 관찰하는 어른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익숙치 않기에 인상적이다. 조숙한 어린아이는 철학자다. 관찰하고 이해한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p.252)" 라는 점을 지나치게 일찍 알아버린 아이. 아이이기에 이해할 수 있는 삶의 본질.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p.116)" 하층민의, 소외된 사람들의, 창녀의, 노인의 삶을 지켜보고 함께 살아내야 하는 아이는, 모모는, "생이 나를 짓밟고 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 (p.148)" 하고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넣어주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 (p.296)" 하며 로자의 죽음을, 존엄한 선택을 존중한다. 화장을 시켜주고 향수를 뿌려주며 가능한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킨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p.108)" 거나,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p.69)" 라는 통찰이 좋았다. 남겨진 아이는 또 사랑하며 살아가겠지. 그 사랑을 끌어안은 채.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가 아이답게 상상하고 꿈꾸며 사는 세상을 바란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도, 카츠 선생님의 돛배에 올라탄 채 난생 처음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그 순간, 비로소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p.33)"

 

 

04. 처음 읽는 여성세계사 (2017) -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역사 속에 왜 여성은 거의 없거나, 나쁜 쪽으로만 기술되어 있는가. 저자들은 이미 편파적인 역사에 자신들이 덧붙일 퍼즐을 제시한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지울 수는 없다. 따라서 전혀 다른 새 퍼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퍼즐에 몇 개의 빠진 조각을 채워 넣으려는 것이다. (p.14)" 서문을 증명하듯, 이 책은 아주 옛날부터 세계사를 훑으며, 왜곡된 이미지의 혹은 잊혀졌던 여성들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더해가며 글을 이끌어간다. 쉽고 편안한 문체가 물 흐르는 듯한 독서를 가능케 한다. 정확한 시기 등의 제반 정보를 빠짐없이 나열하는 정보전달 목적의 역사서가 아닌, 구술처럼 풀어내는 이야기 책이다. 그럼에도 잊혀진, 고의로 지워지고 삭제된 생경한 이름들을 마주하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다. 억압과 박해 속에서도 온몸으로 존재감을 내뿜으며 인간으로서 존재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과 삶과 업적. "많은 여성들이 이미 오래전에 세상의 닫힌 문을 여는 길을 찾아냈다. 자신이 공적 활동을 할 수 없었기에 거꾸로 공적 생활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p.352)" 살롱이 생겨난 근간이 명확해진다. 근대와 현대의 차이는 무엇인가. 노예제는 폐지되었으나 그들을 위해 노력한 여성들의 평등 요구는 왜 묵살되었는가.

 

"여성들은 당연한 것을 요구했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착하거나 못될 수 있고, 정직하거나 거짓말할 수 있으며, 똑똑하거나 멍청할 수 있고, 남을 먼저 생각하거나 이기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자가 용기를 내서 해당 권리를 요구할 때면 오히려 남자들보다 다른 여자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p.414)"

 

여적여가 아니라, 학습된 편견과 명예 남성의 결과물이다. 한국 여성의 여성 한국사가 궁금해진다.

 

 

05. 인형의 집 (1881) - 헨리크 입센

 

당대에 주체성을 인지하고 추구하며 행동에 나선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20세기 희곡 문학의 거장을 이제야 접했다는 게 놀랍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 종속되어, 누군가의 '종달새'이자 '인형'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부당함에 저항한다. "당신과 우리 아빠가 날 죄인으로 만든 거죠. 지금 내가 이렇게 무력해진 건 당신들 잘못이에요. (p.122, <인형의 집>)" 라는 노라의 지적은 현대의 가스라이팅을 정확히 지적한다. "난 더이상 그렇게 믿지 않아요. 내가 믿는 건 내가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 난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얘기에 대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만족할 수 없어요. 그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나 스스로 깊이 생각해 봐야겠어요. (p.124, <인형의 집>)" 라는 선언은,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며 더이상 사회가 구축하고 주입하는 불평등을 무력하게 좌시하거나 체념하며 수용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결단이다. "난 이제 내 자신을 알게 됐어요. 난 세상과 나 가운데 누가 옳은지 확인하겠어요. (p.126, <인형의 집>)" 단호한 결정은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단 한 가닥만 풀어보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풀리는 것 같더군요. 하나를 풀어내니 전체가 다 찢어져 버린 거죠. 그래서 난 알게 됐죠. 모든 것이 다 재봉틀로 박음질해 놓은 거였구나! (p.189, <유령>)" 규정된 틀을 찢고 깨부수는 과정이 필요하다. 130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 부끄럽다.

 

 

06. 시라노 (2006) - 제레딘 매코크런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과는 또 다른, 가볍고 유쾌하고 직설적인 소설. 극을 보면 느꼈던, 혹은 가늠해 보았던 시라노의 감정과 생각들이 텍스트로써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프랑스의 감성을 빌려온 영국인의 글이라는 점이 우습고 신선했다. 글 전반에 여러 번 등장한 단어를, 천국의 문 앞에서 바치겠노라 미소 지으며 시라노가 말한다. "내... 파나슈! (p.171)"

 

 

07. 페테르부르트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1790) - 알렉산드르 라디세프

 

당대 러시아의 분위기와 지식인층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독특한 책. 러시아 문학 특유의 만연체임에도, 번뜩이는 재치가 담긴 문체가 매력적이었다. 부당한 세금, 무책임한 관료, 동떨어진 교육, 노예제와 농노제, 검열 등의 사회문제를 다양하게 열거하며 여러 방식으로 비판한다. 절대자가 된 꿈속에서 만난 순례자 이야기로 진실을 비유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주변의 모든 상황과 거짓과 탐욕이 진실을 밀어낼지라도, 이 자리에 그대로 서서 지도자가 멀어버린 눈을 다시 뜨고 자신을 발견하길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당신은 너무나 지독하게 눈이 멀어 한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이제는 이런 상황에 전율하십시오. (...) 하지만 약속드리오니, 저는 당신의 영토 안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 멀리서라도 저를 부르십시오. (...) 제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p.52)" 이어 진실한 친구, 용기 있게 비판하는 진정한 친구를 알아보고 대접하라 조언한다. "차르의 권력이 미치는 곳에서, 모두가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곳에서 차르를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순례자이기 때문입니다. (p.53)"

 

"이미 알고 있는 행복은 오랜 기다림에서 오는 달콤함을 잃어버린다. 무기력과 조우하게 되면, 현재의 즐거움에서 비롯된 매혹은 뜻밖에 얻게 되는 쾌락이 주는 기분 좋은 떨림을 더 이상 만들어 내지 못하게 됨을 알아야 하리라. (p.78)"

 

 

08. 언제나, 노회찬 어록 (2019) - 강상구

 

한 인간의 삶은 죽음 이후 어떻게 기억되는가. 인간 노회찬을 아는 이들은 각자의 경험으로 그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다가, 결국 그와 함께 꿈꿨던 세상을 위해 다시 일어서 걸으리라 다짐하게 된다. 슬픔을 딛고 다시 희망을 상상하고 목표하게 만드는 힘. 가시밭 가득했던 순탄치 않은 인생을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낸 삶이란 이러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남겨진 이들은 온 마음으로 그를 기억하고 그의 가치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닦고 웃음 지을 수 있다. "실패로 끝난 게 아니고 실패하고 있는 중이죠, 계속해서. (p.377)" 지레 실패를 거부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섰던 사람. 해야 하니까, 그게 옳다고 믿으니까, 하고 싶은 일이니까. 무던하고 끈질긴, 지치기보다는 그조차 원동력으로 삼았던 사람. "돌이켜보면 후회가 되는 대목들도 있지만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놔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 오히려 앞일을 생각하고 노력하며 사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p.81)" 계속해서 초심을 유지하려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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