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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거의 모든 인터넷의 역사 - 정지훈
제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된 인터넷의 역사와 그 안의 인물들, 기업들에 대해 다루는 책이다. 후반부 저자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과할 정도로 열러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정보와 기술, 노하우 등을 개방하여 공유함으로써 "개방형 혁신 (Open Innovation)" 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길임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개인이 자신의 정보를 넘겨주는 걸 "선택" 할 수 있다고? 아무리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으려 해도 단 한 번의 클릭 실수만으로 선호도, 관심, 주소, 취향 등 모든 정보들이 노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는 게 현대인이다. 물론 개개인은 '생각보다' 자신의 정보를 팔아넘기는데 무감하긴 하지만, 결코 그 '팔아넘김' 을 자발적으로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다. 아무튼 공유하고 소통하며 보다 편리하고 적극적인 삶을 위해 도적해온 사람들 덕에 별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이 놀라운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 대단한 우연이자 기회임을 실감했다.
02. 싱가포르, 이곳 - 장기웅
익숙한 문체, 크게 와닿지 않는 단순한 파편 뿐인 문장들. 지난해 휴가로 다녀온 싱가포르라는 이름 때문에 집어든 책이지만, 원하는 방식이나 기대한 수준이 아니어서 아쉬웠다. 특히 사진과 글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글의 감성을 떨어뜨렸다.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거리와 시간의 제한이 아니라 그리움의 부재라는 것을.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설레지 않는 이유는 장소와 여정의 불만족이 아닌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을. (p.183)"
03. 몬테크리스토 백작 1~5권 - 알렉산드르 뒤마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읽었던 장편소설. 역시 고전소설은, 원작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흡입력과 매서운 통찰력, 독보적인 섬세함과 꼼꼼한 묘사로 단숨에 독자의 흥미를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여러 캐릭터들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내며 마치 실제로 있을 법한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과 동시에 풍부한 설명으로 해당 사건이 눈 앞에 선연히 펼쳐지듯 시각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당테스의 절망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아픈 부분도 있었고, 생각보다 똑똑하고 교활한 당글라르와 뮤지컬과 다르게 혈기왕성함만 가득한 불 같은 스페인 사람 페르낭도 인상적이었다. 인정을 가진 인간이면서도 절망과 기회를 포착해내는 순발력을 지닌 빌포르 부분도 좋았다. 탈옥을 한 이후의 흥미진진한 모험들을 읽으면서 '과거의 내 모습' 넘버의 "놀라운 일 많았고 / 수많은 삶 살아도" 라는 가사가 얼마나 함축적이었는지를 온전히 이해했다. "창백하다는 것은 백작의 얼굴에 있어서 유일한 결점인 동시에,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징인지도 몰랐다. (...) 불타는 듯한 눈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다. 입술은 오만하게 사람들을 비웃는 듯했으며,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듣는 사람의 기억 속에 깊숙이 파고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2권, p.326)" 이러한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외양 묘사들이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미스테리한 부자에 흡혈귀 같은 외양, 똑똑하고 시니컬하며 박학다식하면서 무엇보다, 재차 강조하자면 돈이 넘쳐 흐를 듯 쏟아지는 사람이라니. 매사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며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냉정함도 있고, 능구렁이 같고 의뭉스러운 화술에 다양한 사례와 반박이 어려운 논리로 상대를 제압하는 궤변가이기도 하다. 세상이 정의를 실현해주지 않으니 제 손으로 '신의 섭리' 를 이행하겠노라고, 복수의 대상이기도 한 빌포르의 면전에서 선언하는 대담함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소한 사건이 마중물이 되어 서로 엮이고 관계가 발전되어 나가는 이야기를 보며 작가의 영리함에 여러 번 감탄하기도 했다. 몬테크리스토의 심경 변화도 아주 설득력 있게 풀어냈고. "내가 지금 아무 증오도, 자만심도 없이 다만 조금의 회한 만을 품고 이곳을 떠나간다는 것을 신만은 알고 있다. (...) 안녕히! 파리여, 안녕히! (5권, p.348)"
04. 그럴 때도 있다 - 김현정
디자인과 패션사진. 실제로 접해 본 경험이 없는 전공이기에 남의 삶을 훔쳐보듯 구경할 수 있었다. 준비를 함으로써 다양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점을 배워야겠더라. "경험이란 하면 할수록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또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확실하다. (p.231)"
05. 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마치 희곡처럼, 대사만으로 진행되는 소설. 몰리나가 영화를 구술로 풀어내어 서술하는 게 매력적이었다. 대사를 통해 화자의 이름을, 나이를, 상황을, 성격을 상상하는 경험이 신선했다. 특히 몰리나의 '여자' 인형 이야기를 듣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발렌틴의 표정을 상상하는 게 재미있었다. 심리학적으로도 고민해볼 꺼리가 많은 것 같은데, 그냥 술술 흘러가듯 읽어냈다.
06. 거짓말이다 - 김탁환
집단적 트라우마. 세월호는 단순한 대형 재난이자 인재를 뛰어 넘어, 사회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프지만, 그럼에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 그대로 정체될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어렵게 시작했다. 그 억울함, 헤아릴 수 없을 공포와 고통과 막막함, 이렇게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음을 행운이자 우연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는 사회. 구조 받은 '살아남은 생존자' 든, 미처 나오지 못한 '실종자' 든, 차갑게 식어 뭍으로 나온 '희생자' 든, 그들의 '유가족' 이든, 짙고 망연한 바다 속에서 국가에 버림 받은 '민간 잠수사' 든, 이 국가의 현실을 두 눈으로 마주하며 절망한 '국민' 이든, 모두가 피해자이고 전원이 희생자이다. 각자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또 어떻게든 한 걸음 씩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서로 연대하고 의지해야 하나보다. "뜨겁게 읽고 차갑게 분노하라. (p.389)"
07. 거리에 선 페미니즘 - 한국여성민우회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화장실에서 살인이 벌어졌다. '여성' 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23살의 청춘이 무력하게 삶을 잃었다. 이 일을 기점으로 포스트잇과 추모의 행렬이 지속되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던 '여성혐오' 를 일상처럼 마주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조금씩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억압을, 공포를, 분노를, 고통을, 차별을, 더 이상 자기검열하고 억압하고 숨기고 '개인적인 일' 로 치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공론화하고, 정치적인 일로 부각시켜 '정상적인 사회' 에서 '정상적인 삶' 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본다고 말한다. 그렇게 여성들은 더 이상 수지 않고 말을 삼키지 않는다. 불편함을 불편하다 말하고, 올바르지 않은 일에 문제를 제기하며, 여혐은 '혐오' 라 단언한다. "여성들의 경험이 공론화되기 어려운 것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경험에 쉽게 낙인 찍으려 하기 때문이고, 드러내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드러낼 장소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들어가며 中, p.14)" 우연히 살아남았지만 죽어가고 있다. 살아남자, 라는 말이 왜 이리 절박해야 하는가.
08. 인생 - 위화
중국 소설 특유의, 한 인간의 풍파 많은 삶을 덤덤한 어조로 풀어나간다. 다만 이 소설은 화자의 이야기를 '청취' 하는 인물이 존재하는, 액자형태를 취한다. 그 인물이 현재 어떻게 어떠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까지 담아낼 수 있는 효과적인 서술방법이다. "원제 '살아간다는 것(活着)' 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말은 (...)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 (저자 한국어판 서문 中, p.8)" 때로는 불행이 전화위복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찰나의 행복이 한 순간 무너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기에, 주인공 푸구이는 그렇게 제 걸음속도에 맞춰 여전히 살아간다.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면서.
09.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 천명관
단편소설집은 완결성보다는 작가의 특성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비참한, 가난한, 외로운, 고통스러운 인생들을 뜯어보고 가능한 섬세하고 처절하고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류의 문체가 그리 즐겁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어떠한 기조로 왜 이러한 글을 굳이 쓰는 지는 이해가 된다. 이 모든 삶들이 누군가의 인생이려니. 이게 삶이려니.
10.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난해했다. 이 또한 '무의미의 축제' 인가? "하찮고 의미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p.147)"
11.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도정일
짧은 기고문, 칼럼 등을 모아 엮어낸 산문집인데, 작성일이 들쭉날쭉하고 주제 별로 엮어냈다는 인상이 들지 않는 편집과 구성이 아쉬웠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 의 영위에 있다. (...)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 pleasure 이 아니라 즐거움 joy 이다. (...)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 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p.122)" 라는 문장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아름다운 건 '쓰질데 있을' 필요가 없다. "비판에는 기억이 절대적이며 따라서 기억이 정지된 곳에서는 비판, 성찰, 교정이 불가능하다. 망각은 정확히 비판력의 마비이다. (...) 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 된다. (...)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균형 속에서 그의 현재를 관리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p.256-7)"
12. 리츠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로 유명한 작가의 다른 단편소설집. 20세기 초 미국 등지의 상류층 혹은 부자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는 점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 "갑자기 그는 '방탕' 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무엇인가 有를 無로 만들어 버리는 것 말이다. (<다시 찾아온 바빌론>中, p.158)"
13. 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p.9)"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렵거나 힘들다고 도망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올곧게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다. "공적 글쓰기 (p.60)" 라는 명칭과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p.60)" 라는 문장이 내 글에 대한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나름의 자기검열을 거친다. 읽는 이가 오해하거나 곡해해서 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하고픈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고, 개취를 운운하며 틀에 가두기도 한다. 이게 적절한 글쓰기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대상에서 비범한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안목,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비틀어보고 뒤집어 생각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p.128-9)" 라는 내용이나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 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p.16)" 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14. 노년은 아름다워 - 새로운 미의 탄생 - 김영옥
나의 노년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책이다. '노년' 이나 '늙음' 이 부정적으로만 소비되는 한국 사회에서 무사히 늙음을 경험하고 죽음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한 번 더 읽고 리뷰를 다시 써볼 생각이다.
15.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강윤중
'사진 작가' 에 방점이 찍혀있다기보다는, '기자' 특유의 기록성에 초점을 맞춘 책이었다. 사회의 여러 소외계층에게 접근하고 그들을 이해 및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며 '썰' 을 푸는 글이었다.
16.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진지하고 담담한 표면 아래 휘몰아치는 하나의 우주를 따뜻한 마음을 담뿍 담아 덤덤하지만 애틋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평생을 '관조' 하며 살아낸 한 인물의, 극적일 듯하면서도 평탄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수십년의 세월을 흡입력 있게 풀어냈다. 저자가 이 인물을 슬프거나 불행하게가 아니라, '훌륭한 삶' 을 살았다 평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꾸준히, 치열하게, 자신만의 길과 시간을, 또박또박 걸어온 삶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p.353)"
17. 달 - 히라노 게이치로
우연한 만남, 흐르는 대로 변하는 목적지, 계시 같은 '나비' 와의 재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 몽중몽. 여운 있고 묘한 의문과 설렘 같은 기대가 소설 내내 흩뿌려져 있다. 신인의 두 번째 소설이라기엔 철학이 깊고 여운이 짙다. '달' 이 차고 지는 것을 통해 시간 개념이 없는 듯한 공간 속에 흐르는 시간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정열'은 뜨겁게 녹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한 덩이 유리이다. 그것을 생활에 쓰고자 한다면, 거기에 세상의 범용한 형태를 부여하고, 만만하게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식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식어버린 유리에 남겨진 빛은 가냘프기 짝이 없다. 이윽고 그 빛마저도 잃고 손때에 흐릿해져가서 마침내는 일상의 너무도 무의미한 순간에 뜻하지 않게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다. (p.41)"
18. 제노사이드 - 다카노 가즈아키
인간 본성의 善을 간절히, 진심으로 믿지만,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을 보고 있자면 그 작은 기대마저도 빼앗기는 기분이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p.415)" 진화나 신인류나 신약개발 등의 이야기는 소설의 msg 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일본 작가이지만 일제의 과거에 대한 판단이 기억에 남았다. "선조가 어리석으면 후손이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p.171)"
19. 톰 소여의 모험 - 마크 트웨인
어릴 적에 설핏 읽어본 기억이 있으나, 뮤지컬 스옵마 때문에 한 번 더 읽어봤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육에 대해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동화 같은, '어린이를 위한' 소설이었다.
20. 사법부 - 한홍구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현대사 속 사법부의 역사. 무고한 이들을 권력으로 억압하고 강제하여, 法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의 원칙조차 지켜내지 못한 집단지성에 대한 성찰이자 매서운 질책이 담겼다. "역시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기본 사명을 내팽개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권력집단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법부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고문당했다고 절절히 호소하건만 이를 묵살한 사법 엘리트 개개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p.15)" 라는 목적의식이 있었다. "징역을 살러 가며 김근태는 (...) '이것은 본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이 시대 우리의 비극으로서 우리가 같은 공감대를 갖고 통곡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라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는 재판부와 검찰과는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어떤 '공감대' 를 가져본 적이 없다. 통곡은 계속되고 있다. (p.334)"
21. 브릿마리 여기 있다 - 프레드릭 배크만
"브릿마리 씨가 저의 눈부신 이야기예요. (p.405)" 평생 존재감 없이 살아온, 강박증 있고 잔소리꾼이었던 브릿마리의 변화.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팩신으로 유리창을 닦았고, 그래서 아무 문제 없이 세상을 깨끗하게 볼 수 있었다. / 세상이 그녀를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p.61)" 공이 있으니 찬다는 아이들, 리버풀의 믿음, 축구를, 버려진 도시를 통해 일종의 '성장' 을 하는 캐릭터의 매력이 눈부셨다.
22. 처럼 - 시로 만나는 윤동주 - 김응교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보다 깊이 있게 그를 기리는 시도들을 받아들이고 싶어 읽게 된 책인데 기대 이상으로 쉽고 풍성해서 유익했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나는 '처럼' '같이' 라는 직유법은 타자에 대한 동일성을 향하고 있지요. (...) 윤동주는 타자와의 '차이' 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동일화'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요. (p.311)" 부끄러움, 자기성찰, 슬픔, 흐릿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 시인 윤동주의 생애와 그가 남긴 시들을 읽다보니,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유의미한 하나의 삶이 보인다. "윤동주의 시에 나타난 종교적 상징의 표현을 보면, (...) 고통 그대로 부닥치려는 다짐의 자세가 엿보입니다. (...) 고통스러운 오늘을 관념적인 내세관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직접 당차게 맞서는 태도입니다. (p.71)" 라거나 "윤동주의 시는 독자들에게 참혹한 시대라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버티고 이겨내라고 권합니다. (...) 윤동주는 철저한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하여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제시했습니다. (p.510)" 라는 평가가 윤동주가 여전히 읽히는 이유겠지.
23. 서쪽 숲에 갔다 - 편혜영
음산하고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짙고 깊은 숲. 그 숲을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과 세워진 마을, 그 속의 관계에서 야기된 사소하지만 선명한 이야깃거리들. 미스테리 추리 소설 같으면서도 명확한 결말 없이 끝나는 소설이지만, 뒷맛이 찝찝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이고 담백한 작가의 문체 덕분이었다. "그 느낌은 숲이 언제나 다수라는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 숲은 복수였고 전체였다. (p.181)"
24. 왜 분노해야 하는가 - 장하성
한국에서 '정의' 그리고 '불평등' 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고민하고 분석하며 현 상황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한 건 확실히 얼마 되지 않았다. 사회의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이 '원인' 이기에 굳이 이슈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를 쓴 탓이리라. "루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시작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힘(권력)의 불평등을 만들고, 힘(권력)의 불평등이 가난한 자들을 권력에 예속되고 복종하는 '노예'의 상태로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즉 ' 자유의 불평등' 으로 귀착된다고 본 것이다. (p.305-6)" 실제 한국의 역사적 통계를 들어 불평등한 현실을 실증하는 시도를 한다. 특히 재산소득보다 노동소득이 더 큰 불평등의 요인이라는 증거들은 충격적이었다.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정확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선 무조건적이고 수동적인 수용의 자세에서 탈피해야 하겠다. "복지를 통한 '재분배' 이전에 성장의 성과만큼이라도 임금으로 보상 받는 원천적 '분배' 바로잡기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p.454-5)"
25. 읽다 - 김영하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시리즈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 "고전은 처음부터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웠는데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p.16)" 고전이 유의미한 이유를 정확히 짚어준 대목이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p.141)"
26. 밤을 사냥하는 자들 - 바버라 햄블리
긴장감은 있었으나 생각보다 흡입력이 좋은 소설은 아니었다. 묘사와 설명이 많고, 주인공 애셔의 사념이나 과거사 등이 과할 정도로 잦은 빈도였기에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인간과 다르지만 우리만의 지각능력이 있으니까요.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느끼고 맛보죠. (...) 우리가 피와 함께 마시는 것, 그것은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p.132)" 인물들의 감정 변화에 대한 설득력도 높았고, 20세기 초 특유의 분위기가 묘한 느낌으로 생생했다.
27.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 박수영
인종, 성별, 나이, 문화, 국적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시선 차이가 여실히 드러 났다.
28. 그리움은 모두 북유럽에서 왔다 - 양정훈
"무언가 절박한 것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딘가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믿었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는 그렇게 노르웨이 숲을 처음 만났습니다. (p.231)"
29.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어느날 갑자기 소송을 당했는데 그 이유도, 해결 방법도, 상황 자체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이 없다.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가려고 하지만, 권력은 그리고 선례들은 견고하고 막막하다. 보여지는 건 별다른 힘이 없는 하급들임에도 그들의 권위를 뽐내기 바쁘고, 소문과 추측과 인맥 만이 '사실' 보다 중시된다.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세요! (...)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히 떠 있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 전과 다름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p.156)" 라며 조직적인 권력에 대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납작 엎드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개인은 결국 집단의 전체적인 모습을 결코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섬뜩했다. 주인공처럼 독자 역시 이해할 수 없는 희미하지만 묵중한 권력에 짓눌린다.
30.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 김석철
"건축은 도시의 부분이고 도시는 건축의 집합이다. (p.273)" 건축은 역사를 알고 인간을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지금껏 다녀온 여러 도시들, 목격하고 감탄하며 압도당했던 수많은 건물들이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내고 후대에 전해준 가장 큰 자산이었다. "건축은 역사적 사실의 가장 강력한 증거 (p.84)" 이고, "필요에 국한된 건축은 당대에 의미가 소멸하지만 본질을 말하는 건축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 (p.50)" 임은 분명하다. "공동의 필요를 예술적 경지의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 때 도시 문명이 시작되는 것 (p.183)" 임을 기억해야 도시를, 제 모습이자 본 의미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은 빛 가운데 존재한다. 빛을 통하여 공간은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낸다. (p.163)" 라거나 "피라미드는 삶과 하나인 영원한 죽음의 시간을 말하는 그들의 상형문자다. (p.25)" 는 비유에 인문학적 가치관이 담겨 있다.
31. 파피용 - 베르나르 베르베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같은, 혹은 비슷한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는 절망스런 이야기. 작가 특유의, 시니컬하지만 결국 인간, 나아가 생명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담긴 글이 흡입력 있게 다가왔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p.63)" 는 말처럼, 이 자극과 고통에 절대 둔감해지지 않고, 끝없이 각성하고 회의하고 반발하며 '이 지구' 위에서 보다 단단하게 살아가야겠다.
32. 연애하지 않을 자유: 행복한 비연애생활자를 위한 본격 싱글학 - 이진송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되는 언어들과 웃음을 감출 수 없는 가상의 남친 이야기, 구구절절 공감가는 빠수니이자 덕후의 관점까지 완전히 공감하여 몰입했다.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풍토는 여성혐오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풀어내어 유익했다. "만연한 여성 혐오의 원인 중 하나로 연애지상주의를 꼽는다. (p.220)" 는 문장이야말로 이 책을 관통하는, 연애 위주로 굴러가는 풍토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핵심 주장이다. "제도 바깥으로 걸어 나가는 자유는 생존을 담보로 한다. (p.230)" 라거나 "연애하지 않을 지언정 제 기준에 못생긴 사람을 만나기 싫을 수 있다. (...) '눈을 낮춘 연애' 보다 '취향을 고수하는 비연애' 를 선택한 셈 (p.30)" 이라는 문장들이 강하게 다가왔다. 이 시대에 여러 이유로 연애하지 않는 혹은 보류하고 있는 이들에게 강력한 '논리' 라는 무기를 갖춰보기 위해 일독하라고 권하고 싶다. 또한 연애를 저도 모르게 강요하는, 소위 말하는 '순수한 의도' 로 '조언' 해주는 오만한 사회 주류들에게도 역시 강권하고 싶다. 그리고 신화를 다룬 챕터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나이 듦'을 약점이 아닌 개성으로, 고유한 경쟁력으로 전복하는 신화의 행보는 독보적일 수밖에 없다. (...) 신화의 가치는 골동품처럼 그저 시간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 산업의 판도를 전복하고 새롭게 배치한 것으로 증명된다. (p.266)"
33. 무지개떡 건축 - 황두진
가게와 주거 공간이 공존하는 상가건물이 어렸을 적에는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아파트가 대표적인 주거공간이 되며 점차 사라진 양식이 되었다. 앞으로의 주거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저자는 무지개떡처럼, 층마다 기능을 달리하는 형태의 건물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수평적 도시 확대에서 수직적 확대로 전환해야 함을 강조하며 '밀도' 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도시 기능들이 서로 섞이고 연결되었을 때, 특히 주거가 도시 한복판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높으면 높을수록, 비로소 질적으로 우수한 고밀도가 형성된다. (p.48)" 종로구 등이 밤이면 '유령도시화' 되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낸 지점이다.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가장 확실하게 높여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출퇴근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이다. (p.51)" 주거와 일터, 자연과 교류의 공존, 그럼으로 인한 도시의 '재개발' 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필요하다.
34. 파리의 생활좌파들 - 목수정
좌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다양한 사례제시집이다. 특히 현대인의 일상을 점령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의미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며 살아감으로써 간단히 세상의 종교인 자본을 제압한다. (p.39)" 라는 태도가 전반적인 인터뷰이들의 삶에 깔려있는 관점이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선 (...)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경험들이 축적되는 게 중요 (p.58)" 하다는 인식, "자신을 가장 건강하게 복원시키는 방법 (...) 그 힘은 문학과 철학, 인문학이 (...) 선사한 존엄 그리고 사유의 힘에서 나온 것 (p.152)" 이라는 판단이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유의미한 개체로 거듭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35. 젠더 감성 정치 - 임옥희
친절한 책은 아니지만, 페미니즘 및 철학 쪽에 관심이 있다면 새로운 시각을 접하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폭력, 수치, 애도, 추락, 사랑 등의 감정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젠더 정치에 녹여져 있었는가에 대한 고민과 이에 대한 문학 작품 사례들이 제시된다. 젠더적 측면 뿐만이 아니라 인간 정체성에 대한 고찰도 많아서 곱씹어볼 부분이 많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내가 나를 의식하려면 타자의 존재가 구조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 타자의 출현으로 인해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치심은 타자 앞에서의 수치이다. (p.168)" 라거나 "탈중심화는 타자로 인해 내가 구성되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주체로서의 '나'와 대상으로서의 '나' 사이에는 틈새가 있다. (...) 자족적이고 완전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 타자로서의 여성성, 차이의 이질성을 삭제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폭력적이다. (...) '윤리적 폭력' 이다. (p.80-81)" 라는 문장들이 주체와 타자 간의 관계성 및 인간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만 내가 존재함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p.270)" 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이란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잡다한 타자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공간에서 공존의 가능성은 열린다. (p.98)"
36. 공연예술의 꽃, 뮤지컬 A to Z - 한소영
때때로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어렸을 때 뮤지컬을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접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내 인생은 꽤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37. 자발적 복종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자는 자유를 모르기 때문에, 편하고 쉬운 '자발적 복종' 의 인생을 산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또한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하길 희망한다. 그러나 그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임 (...)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라는 사실 (p.81)" 이라는 점은, 대한민국 교육을 통해 뼈아프게 실감한 바 있다. "복종하는 첫 번째 이유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 독재 하에서 사람들은 쉽사리 비겁해지고 나약해진다. (p.88)" 스스로 깨어나야 '자발적 복종'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선지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자유' 가 얼마나 달콤한지, 동시에 무거운지.
38.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카트리네 마르살
페미니즘의 시야에서 경제학이라는 이론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내용이어서, 흥미롭게 때로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읽은 책이다. '경제적 인간' 이라는 허구와 'ceteris paribus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는 가정)' 으로 진행되는 무균실 같은 전제조건이 과연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막연했던 의문을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비판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학적 논리' 라는 것은 (...)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 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동기가 경제적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p.80-1)" 이제 세상의 모든 것은 경제와 밀접한 이론으로 설명되고 있기에 경제학은 더 큰 책임을 지녀야 한다. "페미니즘 없이는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고,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서는 중요한 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p.291)" 완전히 배제되었던 세상의 절반을, 더 가시화하고 더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경제학 안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해서 작별을 고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p.299)"
39. 시라노 - 에드몽 로스탕
원작의 장르가 '희곡' 이어서 뮤지컬로 넘어오며 각색된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 마지막 한 마디, "나의 장식 깃털. (p.238)" 를 무난하고 감동적인 '영혼' 으로 바꾼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드기슈를 붙들어 놓기 위해 "난 전인미답의 창공을 범하기 위한 여섯 가지의 방법을 발명했소! (p.152)" 하며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점도 달랐다.
40. 계속해보겠습니다 - 황정은
담백한 문체, 특히 나기가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묘사할 때의 그 정갈하고 단정한 문체가 무척 깔끔했다. 드라마틱한 기승전결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백으로 전체의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전개방식과 극 중 인물들의 성격이 잘 어울렸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p.45)" 왜곡되었음을 알지만 '심정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러한 관념 속에서 새로운 혹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이쪽이 더 당연한 관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의 변화 또한 긍정하는 것이, 삶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좋은 것, 이 아니라 그럼에도 덤덤히 일상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삶' 이라고, 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주변 우리네 이야기가 나즈막히 이야기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41. 82년생 김지영 - 조남주
'소설' 의 양식을 빌려쓴 '현실'. 뭐라 덧붙일 말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그저 주변의 한 '여성' 일 뿐이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p.132)" 수백년 간 관습처럼 지속되어 왔기에 그저 '당연하다' 여겨지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그 하나하나에 불편함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만, 인식이 변화하고 세상이 변한다. 더 이상 '유리천장' 이라는 뻔한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취해야 할 스탠스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 역시 주인공처럼 하고픈 말을 계속 속으로만 삭히며 말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42.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누리, 나라
'혐오' 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단순히 '혐오' 라고 규정지어지는 작금의 여러 사건들을, 다양한 분석방법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글들이다.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을 배척하고 억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남성 동성사회성' 이 기득권을 지닌 남성이라는 젠더 내부에서의 결집과 여성에 대한 경계 및 배제를 야기한다. 언어는 권력이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단순히 생체적 특징과 차이가 아니라 역사상 누적되어 온 사회적 '제도' 일 뿐이며, 지금은 이러한 분리가 체화되었기 때문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있었다. "표현의 자유는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당파적인 권리, 즉 보편성을 향한 권리다. (p.105)"
43. 형태뿐인 사랑 - 히라노 게이치로
디자이너의 작품을 글로써 묘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신체에 관심이 있었음을 은유하는 '뮤미' 라던가, 조명을 디자인하며 삶과 상황을 연결시키는 것 등, 이곳저곳에 구조적인 접합부분을 고민하고 설계했다는 '소설' 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단순히 기능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그늘에 숨겨져있고 이면에 드러나 있지 않기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미묘한 감정을 야기한다는 것을 글 전반에 걸쳐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여러 차례 반복하며 의미를 누적하고 고양시킨다. "필요한 것을 비춰주기 위한 조명이 아니라 오히려 쓸데없는 것을 감춰주기 위한 조명 (p.68)" 이라는 시발점에서 시작해, "중요한 것은 빛이 닿는 장소에서 그늘로 향하는, 또한 그늘에서 빛이 닿는 장소에로 향하는 시선의 움직임 (p.357)" 이라는 이해에 도달하며 새로운 의미를 지닌, 기능적이지만 동시에 미적인 의족을 탄생시킨다.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도 잘 녹여냈다. 곱씹을수록 재미있는, 잘 조율된 소설이었다.
44. 나의 페미니즘 레시피 - 장필화 외
여성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학사든 학부든 이 학문을 배워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삶을,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또 든든했다. 그러나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것과는 또 별개로, 역시 어렵다. 재정학이 가장 인상깊게 남았는데, 성인지예산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경하여 충격적이었다. "수치심 유발은 지배와 배제의 가장 손쉬운 전략이고, 회피와 냉소적 반응이야말로 가장 흔한 복종의 표현이다. 수치심으로 도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공간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p.161-2)"
45. 원스 인 더블린 - 곽민지
올해 읽은 여행에세이 중 가장 흥미진진하게 공감하며 읽은 책이다. 3개월, 그 짧은 시간에 도시와 사랑에 빠지고 진심으로 그 곳의 '일상' 이 되어본 점이 부럽고 또 아득했다. "여행이란 원래 그런 일들의 집합체다. 뭘 해도 칭찬받기 힘든 현실을 벗어나서, 하루를 그저 무탈하게 사는 것에 성공하는 나에게 인색했던 칭찬을 몰아주는 일. (p.66)" 조용하고 아늑한, 유럽 느낌 물씬 풍기는 더블린도 언젠간 두근대는 눈을 빛내며 마주할 수 있겠지.
46.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야스미
잔혹동화, 라 지칭하기엔 묘사가 과할 정도로 고어스러웠다. 일본 소설 아니랄까봐. 이상한 나라와 지구 간의 커넥션, 누군가의 꿈, 새로이 설정되는 세계, 어디가 진짜인지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소설 뒤쪽 비평글에서 타인에게 잔인해지는 건 거리 감각의 문제라는 언급을 했는데, 묻지마 범죄나 싸이코패스의 행동에 대한 나름 적합한 설명이라 여겨졌다. "범죄의 증명은 수학의 증명과는 달라. (...) 범죄는 단 하나의 물적 증거나 단 한 마디의 증언으로 증명될 때도 있어. (p.141)"
47. 정글만리 1~3권 - 조정래
막연한 관심만 있던 중국이라는 나라의 '경제' 와 '사회' 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소설이라고는 미리 생각하지 못해서 깜짝 놀랐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임에도 '인간 차별' 과 불평등, 부조리, 무질서가 난무하는 극도의 자본주의. 오만함, 천박함이 아무렇지 않게 그 자체로 사회질서로서 존재한다는 점이 경악스러웠다. 만만디의 자세, 짝퉁과 표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뻔뻔함, 인맥 (꽌시) 야말로 모든 것의 해결책인 후진성 등등 여러 모로 고민해볼만한 요인들이 많았다. 저자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만남과 대화, 사건, 그로 인한 변화 등을 급하지 않게, 만만디의 자세로 풀어나간다. 대화 위주의 진행이나 전대광 등의 대표적인 인물 입에서 나오는 장황한 설명이야말로 작가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주제의식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중국 근현대사에 대해서, 마오쩌뚱이나 덩샤오핑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결국 모든 문화유산이란 황제나 귀족들의 노고나 업적이 아니라 천대받으며 산 미천한 사람들의 피땀이에요. (2권, p.47-8)"
48. 일상 속의 성차별 - 로라 베이츠
"페미니즘은 여성의 우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주장 (p.353)" 이라는 정의야말로 페미니즘에 가장 정확히 부합한다고 믿는다. '성차별' 이 '일상적' 이라는 것이 공론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체념과 복종을 체화하는 것이 사회의 약자이자 소수자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불평등은 하나의 연속체로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하나의 사건에 내재된 태도와 생각들은 다른 사건이 발생하는 토양이 된다. (p.88)" 경험은 누적되고 축적되어 개인을 만들고 사회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대중 매체는 온갖 형태의 잘못된 이상과 규범을 지속시키고 잘못된 행위에 직접 가담하기도 한다. (p.234-5)" 사회의 테제를 남성이 주도하고 좌우하여 '남성의 시각' 을 강요하는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 "직장에서 여성들을 가로막는 문제들은 광범위하기 때문에 특정한 개인을 넘어선다. (...) 사회 전반의 유의미한 변화를 위해 그 틀과 태도를 부숴야 한다. (p.265)" 개인의 인식,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요인을 병행하여 개선해나가야 한다. "그 편견들이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형태의 불평등과 싸우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교차성의 원칙) (p.309)" 재차 강조하지만, 페미니즘이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해야 한다.
49. 집은 인권이다 - 주거권운동네트워크
큰 목표 중 하나였던 독립을, 올해 말 실행했다. 실제로 집을 구하면서 경험하고 피부로 마주한 한국 부동산의 현실에 다시 한 번 절망과 한숨을 쏟아냈는데, 이 책은 그러한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강제로 퇴거 당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의 주거권 문제가 여실히 드러나 있어 도움이 됐다. "'집' 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던져져야 하고, 우리의 상상력은 '권리' 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p.274)" 도시학 역시 근본적으로 주거권, 안정된 '집' 으로부터 시작됨을 새삼스럽지만 뼈아프게 인지했다. "주거권은 물리적인 주거만이 아니라 안전하고, 평화롭고, 존엄하게 살 권리를 말한다. (p.109)" 의식주 중 하나인 주거야말로 인권이 보장되는 시발점이라는 사회적 인식과 공감대 형성이 절실하다. "틀을 짜기 위한 출발점은 '인권' 이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살 만한 집에 살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것으로 개발의 틀을 짜야 한다. (p.106)"